1744년 1월 10일, 권상일이 새해인사와 더불어 재종가에서 필요한 혼례용구를 구하기 위해 사돈인 류성화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44년(영조 20) 1월 10일, 淸臺 權相一이 새해인사와 더불어 자신의 재종가에서 부탁해 온 혼례용구를 구하기 위해 사돈인 豊陽君 柳聖和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상일은 편지 첫머리에서 새해를 맞아 마땅히 사돈에게 새해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겨를이 없어 제 때에 하지 못하고 10일이 지나서야 편지를 보내는 것에 대해 죄송한 마음을 전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며느리, 손녀들과 함께 무사히 송구영신하였다는 안부를 전하며, 더불어 사돈이 있는 곳의 근황을 묻고 요사이 천연두가 기승을 부려 근심을 늦출 수 없다고 하였다. 이어 酉川에 사는 李丈이 돌아가신 것에 대해 영남의 큰 인물이 사라졌다며 깊은 안타까움을 드러내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재종가에서 혼례용구를 구하기 위해 일부러 사람을 보냈다는 이야기를 쓰면서, 이 때문에 편지를 써서 부치니 사돈이 잘 살펴주었음 좋겠다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追錄에서 보다 분명하게 부탁하길, 재종가에서 아이의 초례를 13일 날로 행하기로 했는데 그 날 혼례를 치르는 곳이 너무 많이 紗帽를 구하기가 어려우니 사돈이 혹 갖고 있으면 편지를 가지고 간 사람 편에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권상일(1679-1759)은 忍齋 權大器의 6세손으로 尙州近嵒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安東이고, 字는 台重, 號는 淸臺이며, 부친은 權深(1664-1729)이고 모친은 慶州李氏이다. 1710년(숙종 36) 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承文院 權知副正字로 入仕하여 成均館 典籍, 直講, 禮曹正郞, 萬頃縣令, 蔚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권상일은 두 번째 부인 여주이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煜을 두었으니 정실에게서 얻은 자식은 아들 하나뿐이었다. 권상일은 아들을 1725년에 하회 풍양군 류성화(1668-1748)의 딸과 혼례를 시켰는데, 이 때 욱의 나이가 16세였다. 권상일과 류성화는 이미 오랜 교제가 있던 사이였으며, 사돈을 맺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소식을 전하였다. 욱은 풍산류씨와의 사이에서 3명의 딸을 두었고, 1734년에 25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래서 권상일이 며느리와 손녀들의 안부만을 언급한 것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