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2년 1월 10일, 권한이 돌림병이 도는 상황을 이야기하며 근황을 알리고 자신이 들은 서울 정계 소식을 전하기 위해 류성화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42년 1월 10일, 芝圃 權澣이 돌림병이 도는 상황을 이야기하며 근황을 알리고 자신이 들은 서울 정계 소식을 전하기 위해 西湖 柳聖和에게 보낸 편지이다.
처음, 상대가 새해에 복을 누릴 것이라 생각되어 위로되고 그립다고 했다. 그러나 상복을 입고 있는 자신은 나이만 한 살 더 먹었지 부모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더욱 심해진다고 했다. 그리고 작년 겨울 끝에 마을에 돌림병이 심하게 돌아서 조카 李致和가 喪妻하고 또 친구들의 부고가 날마다 이르러 매우 슬프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친조카인 權相一은 이달 초에 淸臺로 돌림병을 피해 간 상황을 알렸다. 또 永川 孫婦의 묵은 병으로 인해 仁孫이 새해 전에 내려갔는데도 여전히 소식이 없으니 매우 염려된다고 했다. 경상좌도[江左]의 돌림병이 더욱 심한 상황에서 상대의 마을은 괜찮은지 물었다. 다음으로, 상대에게 進士[上舍] 蔡元澄이 서울에서 돌아온 편으로 대략 들은 서울 소식을 전해 주었다. 첫째는 이조판서가 臺諫의 탄핵을 받아 이제 막 사퇴했다고 했다. 둘째는 세자가 3월에 입학한다고 했다. 이 외에는 특별히 전할 만 한 소식은 없고, 홍 정랑[洪正]은 연이어 편안하다고 들은 소식을 전했다.
이 편지의 발급인인 權澣(1677-1749)은 자가 新之, 호는 芝圃, 본관은 安東이다. 조부는 權坵이다. 蔭職으로 嘉善大夫 副護軍을 받았다. 그는 權深의 친동생으로 淸臺 權相一에게는 숙부가 된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권상일을 ‘舍侄’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편지의 수취인인 柳聖和(1668~1748)는 자는 介仲, 호는 西湖, 본관은 豊山이다. 부친은 柳後常(1648~1718)이고 西厓 柳成龍의 5대손이다. 蔭補로 山陰縣監을 지냈다. 戶曹參判에 추증되고 豊陽君에 봉해졌다. 그는 권상일과 사돈지간이므로 그에게 권한은 사돈댁의 査丈이 된다.
본문에 등장하는 ‘李侄致和’는 李萬育(1715~?)으로 그의 자가 ‘致和’이며 본관은 延安이고, 부친은 李澳이다. 다음으로 ‘舍侄’은 친 조카인 權相一(1679~1759)로서 자는 台仲, 호는 淸臺, 본관은 安東이며 시호는 僖靖이다. 부친은 權深이며 聞慶近癌 출신이다. ‘蔡上舍元澄’은 蔡㵓(1696~1768)으로 자가 元澄이고 호는 後川이며 본관은 仁川이다. 부친은 蔡允亨이며 聞慶에 거주하였고, 權相一의 문인이다. 그는 1740년에 증광시 3등으로 진사에 합격했기에 본문에서 ‘上舍’라고 한 것으로 보인다. 東銓이 臺諫의 탄핵을 받아 사퇴한 사건은 『영조실록』 1741년(영조17) 12월 20일 기사를 참고 해 보면, 당시 銓曹를 要地로 생각하여 서로 시기하며 논핵하던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正言曹命采와 獻納兪宇基 등이 서로 논핵하던 중 이조판서徐宗玉(1688∼1745)이 연루되어 결국 그가 상소하여 사직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따라서 본문에서 권한이 채식에게 전해들은 동전의 사퇴 사건은 바로 서종옥을 말하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편지의 피봉 형식은 따로 떨어진 피봉이 없는 單封의 형태이다. 피봉에는 수취인의 정보로 ‘柳山陰 靜案記室’라고 기록하였고, 그 우측에는 발급인의 정보로 ‘近村權弟 候狀’을 기록하면서 상당히 아래로 내려서 적고 있다. 이는 상대를 높이고 자신을 낮추려는 의미를 가진다. 하단의 봉합처에는 ‘省式謹封’을 적었다. ‘柳山陰’은 바로 산음현감류성화를 뜻한다. 그러나 그가 산음현감에 재직한 시기는 1731년 즈음이었기에 이때는 그 직책을 맡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발급인은 수취인에 대해 ‘조용히 고향에서 기거하고 있는 상대에게’라는 의미로 ‘靜案記室’이라고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近村’은 聞慶近癌을 가리키는데, 당시 권한이 이곳에서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에 ‘省式’을 쓴 것은 편지 본문에서도 자신을 ‘服弟’라고 표현한 것으로 봤을 때 당시 그는 喪服을 입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말해준다.
이 편지는 回文 형식을 이루고 있다. 처음 우측에서 1/4정도 위치에 비교적 굵은 글씨로 쓰인 ‘歲已新矣’에서부터 내용이 시작되며 좌측상단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맨 우측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우측에서 약 3째 줄과 4째 줄에 걸쳐 하단에 연월일과 성명을 기입하였다.
고문서 등 옛 글에서는 상대 또는 윗사람을 높이기 위한 표현으로 擡頭 또는 隔字를 사용한다. 이 편지의 경우는 3번의 대두를 사용하여 모두 極行으로 올렸고, 1번의 격자를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하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