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1년 8월 25일, 김오응이 자신은 미천하여 당신의 간절한 가르침에 부응하기 어렵겠지만 공론이라면 마음을 다할 것이라고 전하기 위해 산음현감류성화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41년(영조 17) 8월 25일에 金五應이 山陰縣監으로 있는 柳聖和에게 어떠한 명을 받았는데 자신은 미천하여 당신의 간절한 가르침에 부응하기 어렵겠지만 공론이라면 마음을 다할 것이라고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김오응은 우선 어버이의 병환에 구애되어 뵙지는 못하지만 상대방을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날마다 지극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상대방의 편지를 받아서 고요히 일상 생활하는 중에 잘 지낸다는 소식을 알았으니 또한 감사하고 또한 위로가 되어 자신의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런 뒤에 자신은 몇 년에 걸친 어버이의 병에 마음을 졸인 것을 어찌 말할 수 있겠냐고 하였다. 당신의 말씀은 친구들이 함께 애석히 여기는 것이라면서 어찌 감히 명령대로 따르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그러나 다만 자신이 미천하고 말이 가벼워서 믿음을 못 받으니, 아마도 당신의 간절한 가르침에 부응하기 어려울 것 같지만 여러 사람들이 칭송하여 천거한다면 마음을 다할 뿐이라고 하였다.
한편 여식의 근행이 멀지 않았으니 그때 혹 뵐 수 있는지 여쭤보았다. 마지막으로 추신부분에 선조문집은 아직 간행하여 배포하지 않았으며 적당하게 상의해서 보여주신 뜻에 부응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발급인 김오응(1699-1749)은 자가 宋瑞, 호는 龜隱, 본관은 安東이다. 1723년(경종 3)에 문과에 급제하고, 1728년 李麟佐가 난을 일으켰을 때 參議하여 영남 선비들의 무고함을 밝혔다. 司憲府監察‧兵曹佐郞‧春秋館記事官‧忠淸都事‧兵曹正郎‧咸平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후진 교육에 전념하였다. 수취인은 류성화(1668-1748)인데, 자가 介仲, 호는 西湖, 본관은 풍산이다. 西厓 柳成龍의 후손이며, 조부는 愚訥齎 柳宜河이다. 蔭職으로 관직에 올랐고, 1731년에 산음현감을 지냈다. 戶曹參判에 증직되고, 豊陽君에 봉해졌다. 유집이 있다고 전한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