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8년 5월 12일, 당시 울산부사를 지내고 있던 권상일이 상주 본가에 왔다가 사돈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으로, 사돈을 초대하고자 보름 뒤에 말과 하인을 보내겠다고 전하기 위해 사돈인 류성화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38년(영조 14) 5월 12일, 당시 蔚山府使를 지내고 있던 권상일이 尙州 본가에 왔다가 사돈의 편지를 받고 쓴 답장으로, 사돈을 초대하고자 보름 뒤에 말과 하인을 보내겠다고 전하기 위해 사돈인 柳聖和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상일은 1735년 3월에 임명되어 1738년 12월에 파직될 때까지 약 3년 9개월간 울산부사를 역임하였다. 이 편지를 쓸 때는 叔母의 상을 당해 잠시 상주 본가에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첫머리에서 그는 자신의 內從兄 權鼎老(1681-1733)가 보내 준 편지 덕분에 그 곳의 근래 소식을 자세히 알 수 있었지만, 바쁘고 어지러워 편지 쓸 겨를이 없었던 것에 대해 변명하였다. 그런 가운데 사돈이 일부러 하인을 통해 편지를 보내셔서 사돈의 평안한 안부를 알게 되었으니 매우 다행스럽다고 인사를 전하였다.
이어서 자신은 돌아와 숙모의 几筵에 곡하니 서글픈 마음을 이길 수 없는데 그래도 며느리와 손자를 보게 되어 서글픈 마음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며 스스로를 달래는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권상일은 울산부사를 지내면서 여러 차례 사표를 제출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했었다. 이 편지에서도 그는 사돈에게 관직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결정하고 전날 사표를 보냈다면서, 어서 빨리 결말이 나서 고향 淸臺에서 한가로이 지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쓰고 있다.
마지막으로 권상일은 보름 이후에 말과 하인을 보낼 것이니 그 편에 꼭 왕림하셔서 열흘 정도 대화를 나누며 회포를 풀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을 전하였다. 자신이 가는 것이 마땅하지만 막 병으로 사직한 몸이라 운신이 어렵고, 또 사돈이 건강을 회복하여 말을 타고 출입할 정도가 되었음을 들었으니 자기가 있는 곳으로 와주시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어서 빨리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편지의 본 내용을 마무리하였다. 그 끝에 다른 여러 형들에게는 바빠서 일일이 편지를 쓰지 못하니 사돈이 대신 안부를 전해달라는 부탁을 追錄하였다.
권상일은 두 번째 부인 여주이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煜을 두었으니 정실에게서 얻은 자식은 아들 하나뿐이었다. 권상일은 아들이 16세가 되던 해인 1725년에 하회 풍양군 류성화(1668-1748)의 딸과 혼례를 시켰다. 권상일과 류성화는 이미 오랜 교제가 있던 사이였으며, 사돈을 맺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소식을 전하였다. 아들 욱은 풍산류씨와의 사이에서 3명의 딸만 두었다. 며느리는 1726년에 첫 딸을 친정에서 출산하고 이후 욱이 죽기 전 1734년까지 2명의 딸을 더 낳았던 것이다. 권욱의 아들 復仁은 욱이 죽고 나서 2년쯤 뒤인 1737년에 그 11촌 족형의 아들을 繼後한 양자이다.
[淸臺日記], 權相一, 한국사료총서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