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3년 8월 9일, 권상일이 사돈의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한 답장으로 자신의 안부와 주변 경황 그리고 서울의 소식에 대해 적어 사돈인 류성화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33년(영조 9) 8월 9일, 權相一이 사돈의 편지를 받고 그에 대한 답장으로 자신의 안부와 주변 경황 그리고 자신이 들은 서울소식을 덧붙여 사돈인 柳聖和에게 보낸 편지이다.
권상일은 첫머리에서 사돈이 일부러 하인을 보내 편지를 전해준 것에 감사해하며 더불어 사돈의 평안함을 알게 되어 기쁘고 또 위로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근래 며느리와 손녀를 함께 만나 본 사실을 말하며 너무나 경사스러워, 다른 자질구레한 일들은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하였다. 이어서 아들은 과거공부를 위해 산장에 가있음을 전하고, 과거시험을 치러 떠나는 날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음을 말하였다.
다음으로 권상일은 사돈과 자신이 사는 곳의 농사상황을 언급하며 이리저리 염려되는 마음을 쓰고 있다. 먼저 사돈이 거주하는 하회의 가을 농사가 이번에도 풍년이 들지 않았음을 들었다며 삼년동안 연달아 흉년이니 사돈이 어떻게 사실 수 있을지 내심 걱정을 표하였다. 또, 자신이 있는 상주는 다행히 흉년을 면하기는 했으나 앞으로 응접할 일이 다른 때 보다 많아서 어려움이 흉년일 때보다 더욱 심할 것이라고 하였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사돈의 편지에 담긴 가까운 시일 내 자신을 방문하겠다고 한 내용을 언급하며 자신이 얼마나 그 만남을 고대하고 있는지를 썼다. 이번 가을에는 반드시 사돈을 만나 회포를 풀 것이라며 스스로 다짐하듯이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고 끝으로 都目政事에 관한 서울소식을 간략하게 追錄는데, 자신도 들은 일이라 정확하지 않다고 하였다.
권상일은 두 번째 부인 여주이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煜을 두었으니 정실에게서 얻은 자식은 아들 하나뿐이었다. 권상일은 아들이 16세가 되던 해인 1725년에 하회 풍양군 류성화(1668-1748)의 딸과 혼례를 시켰다. 권상일과 류성화는 이미 오랜 교제가 있던 사이였으며, 사돈을 맺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소식을 전하였다. 아들 욱은 풍산류씨와의 사이에서 3명의 딸만 두었다. 며느리는 1726년에 첫 딸을 친정에서 출산하고 이후 욱이 죽기 전 1734년까지 2명의 딸을 더 낳았던 것이다. 권욱의 아들 復仁은 욱이 죽고 나서 2년쯤 뒤인 1737년에 그 11촌 족형의 아들을 繼後한 양자이다.
편지를 쓴 권상일(1679-1759)은 忍齋 權大器의 6세손으로 尙州近嵒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安東이고, 字는 台重, 號는 淸臺이며, 부친은 權深(1664-1729)이고 모친은 慶州李氏이다. 1710년(숙종 36) 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承文院 權知副正字로 入仕하여 成均館 典籍, 直講, 禮曹正郞, 萬頃縣令, 蔚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편지를 받은 권상일의 사돈 柳聖和는 本貫이 豊山, 字는 介仲, 號 西湖로 류성룡의 5대손으로 安東에 거주했던 인물이다. 蔭補로 山陰縣監을 지냈다. 死後에 戶曹參判에 증직되고 豊陽君에 봉해졌다. 저서로는 [西湖遺稿]가 전한다.
「淸臺日記」, 權相一, 한국사료총서
김소은, 사학연구 제88호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