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7년 8월 1일, 권심이 아들 권상일이 만경현령에 제수되었음을 알리고 상대와 만나기를 요청하고자 류성화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27년 8월 1일, 權深이 아들 權相一이 萬頃縣令에 제수되었음을 알리고 상대와 만나기를 요청하고자 西湖 柳聖和에게 보낸 편지이다.
처음, 상대의 안부편지를 받아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더위가 물러나고 서늘한 기운이 드는 이 계절에 상복을 입고 있는 상대의 안부를 확인하게 되어 위로된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은 몸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고 했다. 다음으로, 자신의 아들인 淸臺 權相一이 뜻밖에 萬頃縣令에 임명된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는 아들의 부임지에 대하여 피폐하고 거리가 먼 고을이지만 바다를 끼고 있어 물고기가 넉넉히 생산되는 곳이라고 들었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아들이 바라는 지역이기에 다행이라고 했다. 또 孫婦가 더위를 무릅쓴 채 어린 아이를 데리고 탈 없이 잘 도착했고, 또 그 아이의 모습이 범상치 않다는 말을 전했다. 그래서 노쇠한 자신은 이제 원하던 것을 다 이루었다고 하며 ‘백에 한 가지도 근심이 없다’는 옛 말을 인용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들 권상일이 萬頃으로 출발하는 날이 이달 20일 쯤 있을 것 같지만, 자신이 헤아려 보기에 9월 그믐 전에 湖南으로 떠날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출발하기 전에 상대를 만날 수 있기를 바라며 될 수 있으면 빨리 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이 편지의 발급인인 權深(1664-1729)의 본관은 安東이며 바로 淸臺 權相一의 부친이다. 吏曹判書에 추증되었고, 配位는 慶州李氏로 府使李達意의 딸이다. 이 편지가 발급된 해는 그의 나이가 64세였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의 수취인인 柳聖和(1668~1748)는 자는 介仲, 호는 西湖, 본관은 豊山이다. 부친은 柳後常(1648~1718)이고 西厓 柳成龍의 5대손이다. 蔭補로 山陰縣監을 지냈다. 戶曹參判에 추증되고 豊陽君에 봉해졌다. 『西湖遺稿』가 전한다.
이 편지의 피봉 형식은 따로 떨어진 피봉이 없는 單封의 형태이다. 피봉에는 수취인의 정보로 ‘柳院長 服史’라고 기록하였고, 그 좌측에 발급인이 편지를 보낸다는 의미로 ‘答狀上’을 기록하고 있다. 하단의 봉합처에는 ‘省式謹封’을 적었다. 1727년 당시 屛山書院의 원장직을 맡았던 인물은 柳升鉉으로 류성화는 1734년 여름에 처음 이곳 원장직을 맡았다. 이를 통해 보면 위의 ‘류원장’은 확실히 류성화가 맞는지는 알 수 없으며 또한 위의 원장직이 병산서원의 원장직인지도 알 수 없다. 류성화와 관련하여 서애 찰방공파의 인물 가운데 1727년 이전에 병산서원 원장직을 맡았던 인물로는 류성화의 조부인 柳宜河(1692)와 부친인 류후상(1709, 1715)이 있다. 그러나 류후상의 경우는 이 편지가 발급된 해에는 이미 사망하였다. 그리고 발급인은 수취인에 대해 자신을 ‘僕’으로 표현하였고, ‘不宣’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성명 기입 시 상대와의 관계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자신의 이름을 기입하였다. 이는 수취인이 발급인과 거의 연배가 같거나 그 아래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따라서 여러 정황상 류원장을 류성화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듯하다. 피봉에 ‘服史’를 적고 또 ‘省式’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으며, 편지 내용에서도 상대를 ‘服中啓處’라고 표현한 것은 상대가 당시 상복을 입고 있는 상황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하는 단서이다.
권심의 아들인 권상일과 이 편지의 수취인인 류성화는 사돈지간이다. 『풍산류씨세보』에 의하면 류성화의 셋째 딸이 권상일의 아들인 權煜에게 시집갔다. 따라서 본문에서 권심이 말한 ‘孫婦’는 바로 류성화의 딸인 셈이다. 또한 1727년은 권상일이 만경현령에 제수된 해이다. 따라서 위의 편지에서도 이와 관련한 언급이 존재한다.
이 편지는 回文 형식을 이루고 있다. 처음 우측에서 약 4째 줄 비교적 굵은 글씨로 쓰인 ‘前便謹承兩度’에서부터 내용이 시작하여 좌측 방향으로 읽어나가다가 맨 좌측에서 다시 맨 우측 1째 줄 ‘宣 伏惟’ 부분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 우측 3째 줄 하단에 연월일과 성명을 기재하였다.
고문서 등 옛 글에서는 상대 또는 윗사람을 높이기 위한 표현으로 擡頭 또는 隔字를 사용한다. 이 편지의 경우는 대두를 6번 사용하여 모두 極行으로 올려 존경을 표현했다. 격자는 사용하지 않았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