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5년 4월 1일, 권상일이 사돈과 며느리의 안부를 묻고자 아들을 보내면서 더불어 근래 서울 소식을 묻기 위해 사돈인 류성화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25년년(영조 1) 4월 1일에 淸臺 權相一이 사돈과 며느리의 안부를 살피고자 아들을 보내면서 더불어 근래 서울 소식이 어떤지 묻기 위해 사돈인 豊陽君 柳聖和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 첫머리에는 권상일이 사돈의 방문을 무척 기다렸는데 결국 성사되지 못한 것에 대해 자신의 안타까운 마음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을 말하였다. 그리고 상대방의 안부를 물은 후, 자신은 어버이를 잘 봉양하면서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으며 마을의 돌림병도 완전하게 가라앉았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이어서 며느리가 아프다고 했는데 그 경과가 어떠한지 묻고 있다. 또, 아이를 보내 사돈에게 문후를 드리게 하니 잘 가르치고 보호해 주길 바라고, 가능하면 6, 7일 양일 사이에 빨리 돌려보내주길 부탁하고 있다.
편지 뒷부분과 追錄은 모두 궁금한 서울 소식을 묻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江陵府使가 조정에 사은숙배를 생략하고 부임했는지 아니면 사은숙배를 하기 위해 서울로 갔는지 물으며 소식을 듣지 못해 답답한 심경을 토로하였고, 추록에서는 金始鑌(1684-1729)(字 休伯) 숙부가 정말 유배형에 처해졌는지, 修撰趙德麟(1658-1737) 어른이 곧 상소를 올릴 듯 한데 어떤 내용인지, 羅學川(1658-1731)이 司成 벼슬에 사은숙배하기 위해 출발했는지 등을 묻고 있다.
강릉부사는 당시 沃川縣監에 재직 중이던 金{亻+政}을 가리키는데, 권상일이 그가 관직을 높여 강릉부사로 전근하게 된 소식을 듣고 그가 사은숙배는 어떻게 하고 부임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한 것이다. 추록에서 사돈에게 물은 것은 김시빈의 유배와 나학천이 사성 벼슬에 부임했는지에 대한 것이다. 두 사람은 같은 榮川(지금의 영주) 출신으로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지만, 나학천이 영조의 즉위 후에 老論에 가담하여 탕평책에 대한 개선을 계속 진언하며 급기야 상소를 올려 김시빈과 姜樸을 논핵함으로써, 이들을 비롯한 남인들로부터 탄핵을 받게 되었다.
권상일(1679-1759)은 忍齋 權大器의 6세손으로 尙州近嵒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安東이고, 字는 台重, 號는 淸臺이며, 부친은 權深(1664-1729)이고 모친은 慶州李氏이다. 1710년(숙종 36) 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承文院 權知副正字로 入仕하여 成均館 典籍, 直講, 禮曹正郞, 萬頃縣令, 蔚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권상일은 아들 煜(1710-1734)을 1725년 2월 8일에 하회 풍양군 류성화(1668-1748)의 딸과 혼례를 시켰는데, 이 때 욱의 나이가 16세였다. 권상일의 아들은 혼례를 마치고 3일 후에 본가에 돌아왔으나, 며느리는 동행하지 않고 한동안 친정인 하회에 남아 있었다. 다만 아들이 하회 처가에 여러 차례 오가며 서로의 안부를 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권상일이 이 편지를 보낸 때는 아들이 혼례를 올린 지 약 두 달쯤 지난 때였다.
『淸臺日記』, 權相一, 한국사료총서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