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5년 10월 23일, 졸암 김여당이 조카의 과거 합격 소식과 주변에서 일어난 상사에 관해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25년 10월 23일에 拙庵 金汝鏜이 조카의 과거 합격 소식과 주변에서 일어난 喪事에 관해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처음 상대의 백형을 통해 상대의 소식을 들었다고 하며 그간 안부를 물었다. 자신은 기력이 쇠하고 여러 병까지 겹쳐 괴롭게 지내는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중에서도 조카아이가 스물 안팎의 어린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경사를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율리에 사는 생질이 요절한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참혹한 심경을 알리고 또 자신의 매형 역시 이 때문에 슬픈 마음으로 병이 날까 걱정하며 더욱 슬프다고 하였다. 또 자신의 손자의 신례에 대하여 손자와 같은 아이가 상대와 같은 예법의 가문에서 잘 받아들여질지 걱정하며 혹시나 잘못이 있더라도 너그럽게 봐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 외에도 대재형이 상처한 일을 언급하며 슬픈 마음을 표현하였다. 추록에서는 상대의 계씨 등 여러 형제들에게 각각 편지를 쓰지 못해 유감스러우며 이 뜻을 알려달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철에 맞는 민물고기를 상대의 백형께 부탁하여 얻어 보내준다면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풀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발급인인 김여당(1667~1737)은 자가 天集 호는 拙庵 본관은 義城이다. 봉화 ‧ 안동 지역에 거주하였다. 대사간 등을 역임한 開巖 金宇宏의 후손이며 부친은 八吾軒 金聲久이고 형제로는 金汝鍵, 望道 金汝鎔이 있다. 그의 아들은 鶴陰 金景泌이다. 1702년에 식년시 3등으로 진사에 입격하였고, 사후 손자 臥隱 金翰東에 의해 吏曹參判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拙庵集』이 있다.
이 편지는 현재 피봉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정확한 수취인은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본문에서 김여당은 상대에게 자신을 ‘弟’ 또는 ‘世弟’로 표현하였고, 문맥 상 자신의 조카가 상대의 집안에 장가를 든 점, 상대의 백씨와도 친분이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면 대대로 교류관계가 있었던 집안의 동년배 정도의 인물로 밖에는 추정할 수 없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정 중앙에서 약간 우측 지점 즉 전체 폭의 1/3되는 지점인 ‘日前伏承’에서 내용이 시작하였고 모자란 페이지는 맨 우측 끝으로 이어 적고는 연도와 발급인 표기를 하였다. 그리고 연도와 본문 시작 줄 사이의 여백에 첫 번째 추록을 기재하였고, 상여백에 두 번째 추록을 기재하였다. 따라서 정확한 회문식의 배치는 아니나 결국 전반적인 글의 배치가 회문식처럼 되어있어 이 편지를 볼 때는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대두는 약 7회며 모두 극행을 사용하였고 궐은 약 3회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