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5년 3월 7일, 권상일이 자신이 사돈에게 물었던 일에 대한 답장을 받고 쓴 것으로, 그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쓰고 더불어 자신의 근황과 아들은 언제 보내겠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 사돈인 류성화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25년년(영조 1) 3월 7일에 淸臺 權相一이 자신이 사돈에게 물었던 일에 대한 답장을 받고 쓴 것으로, 그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쓰고 더불어 자신의 근황과 아들은 언제 보내겠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 사돈인 豊陽君 柳聖和에게 보낸 편지이다.
1725년 3월 3일에 권상일은 당시 寧海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정보를 묻기 위해 사돈에게 급하게 편지를 부쳤고, 이 날 바로 사돈의 답장을 받아보았다. 이 편지는 그 답장을 받고 4일 뒤인 3월 7일에 사돈에게 다시 답장을 쓰며 자신의 근황과 몇 가지 소식을 전한 것이다. 첫머리에서 권상일은 사돈의 건강함을 알게 되어 기쁘고 또 60리 정도의 거리에서 자주 소식을 전해주는 것에 대해 감사함을 표하고 있다. 그리고 뒤이어 자신이 물었던 영해의 소식이 헛된 것이라니 다행이라면서도 그러한 일이 벌어지게 된 인심과 世道에 대해 탄식하였다. 또, 다른 집들은 이 때 新行을 계획하여 어지러움이 많았는데 자신과 사돈은 애초에 이런 계획을 하지 않아 번거로움이 없었음에 안도감을 전하였다.
다음으로 자신의 근황에 대해 쓰고 있는데, 자신은 道東書院의 향례 준비 때문에 계속 서원에 머물고 있으며 그 곳에서 집안의 소식과 마을의 역병에 대해 듣고 있자니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또 沃川縣監金{亻+政}이 읍내를 지나갔는데 못 만난 것에 대해 서운함을 전하며 그에게 보내는 답장을 함께 보내니 대신 전해주기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끝으로 자신의 아들은 열흘 뒤에 보내겠으며, 권상일 자신 또한 한 번 가고 싶으나 날짜는 기필할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권상일은 두 번째 부인 여주이씨와의 사이에서 아들 煜을 두었으니 정실에게서 얻은 자식은 아들 하나뿐이었다. 권상일은 아들이 16세가 되던 해인 1725년에 하회 풍양군 류성화(1668-1748)의 딸과 혼례를 시켰다. 권상일과 류성화는 이미 오랜 교제가 있던 사이였으며, 사돈을 맺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소식을 전하였다.
편지를 쓴권상일(1679-1759)은 忍齋 權大器의 6세손으로 尙州近嵒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安東이고, 字는 台重, 號는 淸臺이며, 부친은 權深(1664-1729)이고 모친은 慶州李氏이다. 1710년(숙종 36) 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承文院 權知副正字로 入仕하여 成均館 典籍, 直講, 禮曹正郞, 萬頃縣令, 蔚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편지를 받은 권상일의 사돈 柳聖和(1668~1748)는 本貫이 豊山, 字는 介仲, 號 西湖로 류성룡의 5대손으로 安東에 거주했던 인물이다. 蔭補로 山陰縣監을 지냈다. 死後에 戶曹參判에 증직되고 豊陽君에 봉해졌다. 저서로는 『西湖遺稿』가 전한다.
『淸臺日記』, 權相一, 한국사료총서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