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5년 3월 3일, 권상일이 당시 영해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정보를 묻기 위해 사돈인 류성화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25년년(영조 1) 3월 3일에 淸臺 權相一이 당시 寧海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소문을 듣고 그 일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정보를 묻기 위해 사돈인 豊陽君 柳聖和에게 보낸 편지이다.
첫머리에서는 사돈 류성화와 친정에 있는 며느리의 안부를 묻고, 자신의 근황을 전하였다. 편지를 받고 여러 날이 지났으니 사돈의 건강은 어떠한지, 며느리의 얼굴에 난 종기는 다 나았는지 등을 물으면서, 자신은 道東書院의 향례를 위해 서원에 머물고 있음을 말하였다.
다음으로 영해의 시끄러운 사건에 대한 소문이 어떻게 된 일인지 묻고 있는데, 권상일은 사돈이 계신 곳이 영해와 가깝고 또 그 곳에 친척이 많으니 아마도 그 소문에 대한 진상을 정확하게 알고 있을 것 같다면서 보내는 하인을 통해 자신에게 자세히 알려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追錄에 다시 쓰길, 영해의 소식이 헛된 것이 아니면 위험할 수도 있으니 친정에 있는 며느리를 데려와야 할 것 같다며, 혹 사돈이 피해야 한다면 어느 곳으로 가실 계획인지 물었다. 그리고 끝으로 자신의 농장이 골짜기에 있어 피신처로 괜찮을 듯하니 서로 기별하여 세밀하게 의논하자는 당부를 하고 있다.
권상일이 쓴 [淸臺日記]에 보면, 그가 편지를 쓴 이 날의 일기에 영해의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새벽에 들으니 ... 적선이 무수히 와서 영해에 정박하여 이 때문에 영해의 백성들이 영양과 진보 등지로 피신했다고 한다." 아마도 권상일은 자신이 들은 이 소문의 진상을 묻기 위해 새벽에 부랴부랴 사돈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며느리와 사돈을 빨리 피신시켜 안전을 도모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 날 일기의 마지막에는 권상일이 이 날 저녁에 바로 사돈 류성화와 며느리가 쓴 두 통의 답장을 받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권상일은 답장을 받고 그 소문이 대부분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편지를 쓴권상일(1679-1759)은 忍齋 權大器의 6세손으로 尙州近嵒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安東이고, 字는 台重, 號는 淸臺이며, 부친은 權深(1664-1729)이고 모친은 慶州李氏이다. 1710년(숙종 36) 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承文院 權知副正字로 入仕하여 成均館 典籍, 直講, 禮曹正郞, 萬頃縣令, 蔚山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편지를 받은 권상일의 사돈 柳聖和(1668~1748)는 本貫이 豊山, 字는 介仲, 號 西湖로 류성룡의 5대손으로 安東에 거주했던 인물이다. 蔭補로 山陰縣監을 지냈다. 死後에 戶曹參判에 증직되고 豊陽君에 봉해졌다. 저서로는 [西湖遺稿]가 전한다.
『淸臺日記』, 權相一, 한국사료총서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