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1년 4월 2일, 권상하가 제자인 이간에게 지난번에 멀리서 자신을 찾아주어 기쁘고 고맙다는 말과 안부를 전하고 자신의 근황도 함께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711년(숙종 37) 4월 2일에 權尙夏(1641-1721)가 자신의 제자 李柬(1677-1727)에게 안부를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지난번에 멀리서 자신을 찾아주어서 기쁘고 고맙다는 말과 헤어진 후에 상대방의 소식을 듣지 못하여 궁금한 마음, 그리고 자신의 근황에 대해 전하고 있다.
권상하는 우선 지난날 상대방이 멀리서 깊고 험한 산골을 찾아주어서 매우 기쁘고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러면서 돌아가는 길이 바빠서 회포를 만에 하나도 펼치지 못하였으니, 한편으로는 고맙고 한편으로는 서운하여 여태까지도 생각하고 있다고 하면서 상대방도 자신의 마음과 같을 것이라고 하였다. 헤어진 뒤에 소식을 듣지 못하여 어버이를 모시는 것이 모두 편안한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잠시라도 그리움을 쉬지 못하겠다고 간절히 표현하였다.
이어서 자신은 예전처럼 겨우 그대로 살고 있고 부인의 병도 조금 나아졌을 뿐이라고 전하였다. ‘荊’은 아내의 겸칭으로, 후한 때 梁鴻의 아내 孟光이 가시나무 비녀를 꽂은 데서 유래되었다. 荊憂는 아내의 병이라는 뜻이다. 그런 뒤에 자신은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앞으로 만날 날도 묘연하니 편지를 앞에 두고 걱정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발급인 권상하는 본관은 安東, 자는 致道, 호는 遂菴·寒水齋이고, 시호는 文純이다. 1660년(현종 1) 19세로 進士가 되었으나, 宋時烈·宋浚吉을 스승으로 학문에 전심했으며, 송시열의 수제자가 되었다. 16세기에 정립된 이황과 이이의 이론 중 이이-송시열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계승하고, 그의 문인들에 의해 전개되는 이른바 湖洛論辨이라는 학술토론 문화를 일으키는 계기를 주었다. 인성과 물성의 同異論爭인 호락논변이 제자 李柬과 韓元震 사이에 제기되자 이이의 理通氣局설을 들어 한원진의 相異論에 동조함으로써 논쟁이 더욱 확대되어 기호학파는 마침내 양분되었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충주의 누암서원, 청풍의 황강서원, 성주의 노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寒水齋集』, 『三書輯疑』등이 있다. 수취인 이간은 본관은 禮安, 자는 公擧, 호는 巍巖·秋月軒이고, 부호군 李泰亨의 아들로서, 권상하 문하의 八學士 중 한 사람이다.
이 편지는 영천이씨 농암종택에서 엮은「先賢筆蹟」 안에 수록되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