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9년 11월 15일, 김계광이 자신이 다스리는 고을의 상황을 알리고 집안 혼사일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며 상대가 부탁한 물품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669년 11월 15일, 鳩齋 金啓光이 자신이 다스리는 고을의 상황을 알리고 집안 혼사일에 관한 의견을 제시하며 상대가 부탁한 물품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처음, 愛男을 통해 상대의 편지를 받아 안부를 확인하게 되어 위로된다고 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兵使가 자신의 관할지역에 와서 일종의 考課인 歲抄를 행하고 있는 상황을 알렸다. 그리고 國史에 관한 어떠한 일은 그가 오지 않아서 일이 다급하기에 알려 드릴 수 없음을 알렸다. 다음으로, 집안의 혼사는 信中과 林太英이 선택한 12월 19일을 길일로 보았다고 했다. 그래서 移葬하는 일은 내년에는 길일이 없으나 새해가 되기 전에 치른다면 혼사와 서로 겹치게 되어 여의치 않다는 말을 전했다. 또 靑杞의 장삿날도 만일 26일로 정해진다면 그 전에 혼사를 치르는 것도 마땅치 않게 되니, 다시 택일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下道로 가는 행차는 날이 추워 가지 못했고, 또 개가죽을 모으기 힘들어 이불을 만들기 어렵기에 府伯에게 도착하여 禮安에 사람을 보냈지만 허락받기를 기필 할 수 없다고 했다. 다음으로, 仁伯이 銀을 납부하는 일은 兵使가 간 뒤에 해당 관리를 시켜 납부하게 하겠다고 하며 상대에게 長壽를 보내지 말라고 당부했다. 마지막으로, 通應이 보내 준 종이 묶음을 보낸다고 했다. 그러나 상대가 요청한 燈油는 아직 기름을 짜지 못했기에 보내온 기름 담는 용기를 우선 자신이 가지고 있겠다는 말을 전했다.
이 편지의 발급인인 金啓光(1621~1675)은 자는 景謙, 호는 鳩齋, 본관은 安東이다. 부친은 金壆이며 金啓祥의 동생이다. 1654년 식년시에 입격했다. 1660년 증광시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成均館博士 ‧ 直講 ‧ 豊基郡守 등을 역임했다. 『鳩齋集』이 전한다. 위의 편지는 상대에게 편지를 받은 후 답장을 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가 병마절도사에게 歲抄를 받고 있는 상황이나 府伯에게 狗皮로 된 이불을 보내는 일, 銀을 납부하는 일 등을 통해 그는 이 편지의 발행 당시 지방의 수령 정도의 관직을 지내고 있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위 편지로 당시 세간에서는 吉事와 凶事를 겹쳐서 치르지 않으며 또 겹칠 시에는 길사의 택일을 더욱 우선하고 있는 상황을 볼 수 있다.
이 편지는 배접이 되어있고 따로 떨어진 피봉이 없어 현재까지 피봉을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정확한 수취인을 알 수 없다. 본문의 내용으로 수취인에 관해 간략히 유추해 보자면 일단 발급인은 수취인에게 ‘閤履’라는 표현을 하고 있고, 자신의 안부를 이야기 할 적에 ‘此間’이라고 표현하였다. 이를 통해 관직생활을 하고 있는 발급인이 또한 관직생활을 하고 있는 상대에게 보낸 편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상대에게 자신을 표현할 때도 ‘弟’라는 표현을 하고 또 마지막에 성명 다음 ‘拜手’ 또는 ‘再拜’ 등과 같은 말을 붙이지 않았으며, ‘上白’, ‘不具’라는 표현을 사용 한 것을 보면 수취인은 동년배 또는 연배가 비교적 낮은 인물로 추정할 수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 편지는 回文 형식으로 되어있다. 처음 우측에서 3째 줄 ‘愛男來伏承’에서부터 시작하여 좌측으로 읽어나가고, 다시 좌측 상단으로 내용이 이어져 마지막으로 우측 1째줄 ‘下鑑謹答上白’으로 이어진다. 우측 2째 줄에 연월일과 성명을 기재하였다.
고문서 등 옛 글에서는 상대 또는 윗사람을 높이기 위한 표현으로 擡頭 또는 隔字를 사용한다. 이 편지의 경우는 대두를 3번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으며 특별히 極行으로 올린 부분은 없다. 격자는 1번 사용하여 존경을 표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