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7월 12일, 이동표가 자신의 아이와 아버지 병세를 전하며 상대방의 안부를 묻고 추후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쓴 편지
내용 및 특징
○○년 7월 12일, 李東標가 자신의 아이와 아버지 병세에 치료에 도움을 준 의술가를 상대방에게 소개해주면서 상대방과 만날 일을 잊지 않고 있으나 지금은 어려우니 추후에 한 번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 성명 미상의 형에게 쓴 편지이다. 편지를 받는 사람의 이름 없이 다만 형이라는 호칭만 기록되어 있어, 상대방이 누구인지 명확하지 않다.
이동표는 상대방이 보내준 두 통의 편지가 자신에게 매우 위로가되었다는 감사의 인사로 편지의 첫머리를 시작하였다. 그 편지 덕에 상대방이 편안함을 알게 되어 다행인데, 다만 그 집안의 병환이 여전한 것 같아 걱정하는 마음을 전하였다. 그러면서 상주청리에 사는 생원 尹善敎라는 사람이 의술에 정밀하다며 이미 여러 중병 환자들이 효험을 보았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하였다. 자신의 아이의 병에 대해서도 이 사람에게 물어보았는데, 아직 분명하게 효과가 나타나진 않고 있지만 처음보다는 나아졌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어디에 사는지 알려주었다.
이동표는 아마도 상대방과 文殊山에 갈 계획을 세웠던 것 같다. 그런데 집안의 우환이 깊고 더위도 채 가시지 않아 현재로서는 어렵겠다는 뜻을 표하며 가을에나 한 번 도모해보겠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형이 한가할 때 풍기와 영주 사이 교외에서 한 번 만나면 좋겠다는 뜻도 함께 전하고 있다. 文殊山은 지리적인 위치상 경상북도奉化郡에 있는 산인 듯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이 편지를 보낸 李東標(1644~1700)는 본관이 眞寶, 字가 君則, 號는 懶隱으로 경북 예천군금릉리에서 출생하였다. 松齋 李堣(1469~1517)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李雲翼 어머니는 순천김씨 金厚基의 딸이다. 1683년(숙종 9) 증광문과 을과로 급제하여 내관직으로는 성균관 전적, 홍문관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고, 외관직으로는 창락도 찰방, 양양 현감 등을 역임하였다. 기사환국 때 仁顯王后의 폐위를 반대하여 죄를 입은 朴泰輔 · 吳斗寅 등을 伸救하다가 양양현감으로 좌천당하였다. 그 뒤 사간원헌납 · 이조좌랑 · 홍문관 교리 등에 임명되었으나 그때마다 사직하고 귀향하였으므로 사람들은 小退溪라 일컬었다. 예천으로 낙향한 뒤에도 계속하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사직의 상소와 함께 그때마다 직언으로 시정의 개선책을 건의하였다. 저서로는 『懶隱文集』이 있다.
이 편지는 영천이씨 농암종택에서 엮은「先賢筆蹟」 안에 수록되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