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년 ○월 ○일, 류세명이 이현일에게 답장을 쓴 것으로, 어제 이현일이 자신에게 보여 준 문자 가운데 말단 여덟 글자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이 편지는 연도와 날짜를 알 수 없다. 편지의 제일 앞부분과 마지막 날짜부분에 ‘卽’자가 있을 뿐이다. 어느 해 어느 날 寓軒 柳世鳴(1636~1690)이 어제 葛庵 李玄逸(1627-1704)이 자신에게 보여준 文字 중에 말단 여덟 글자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이현일에게 전한 답장편지이다. 이현일이 류세명에게 보여준 문자는 『葛庵集』권18에 있는 「諭館學諸生文」중에 말단 부분을 말하는 듯하다. 이 편지만으로는 수취인이 이현일이라고 나와 있는 곳이 없어 알 수 없지만, 이 서간은 류세명의 문집 『寓軒集』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제목에 「答李翼升」이라고 되어있어 편지를 받는 사람이 이현일임을 알 수 있다. 翼升은 이현일의 자이다.
류세명은 우선 상대방의 건강상의 안부와 일상생활이 더욱 보존하실 것이라 생각된다고 한 뒤 조금 여쭤볼 것이 있다고 말했다. 어제 당신께서 보여주신 문자의 말단 여덟 자는 처음에는 그 혐의에 관여될까 의심했다가 돌이켜 생각하니 상대방께서 이에 반드시 근거한 바가 있으려니 생각했기에 다시 여쭙지 않았다고 하였다. 곧 성균관의 한 사람의 글을 보니, 성균관 유생들이 의심을 품고는 이 여덟 글자를 가지고 갈암에게 전달해 말하니 갈암은 주자가 제생에게 고한 글의 말단에 이러한 말이 있어서 지금 그 용례를 쓴다고 대답했고, 또 우리나라에 쓰고 있는 문자의 격식이 중국과는 같지 않은 것을 근심하니 의심이 없을 수 없는 듯하다고 말했다고 하였다.
본인의 뜻도 이와 같아서 이에 갈암에게 말씀드리니 당신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이어서 자신의 의견을 말한다. 『퇴계선생집』 가운데 諭館學文이라는 글이 있으나 또한 그 말단에 이 말이 있다는 것이 기억나지 않고, 종증조부인 西厓 柳成龍(1542-1607)이 상주목사로 있을 때 쓴 「諭童蒙師長文」이라는 글이 있는데 그 끝에 "於是乎諭"라는 네 글자가 있었으며, 서애가 예조판서가 되었을 때 쓴 「諭館學諸生文」에서 다만 "원컨대 제생들은 서로 권면하길 바란다[願諸生相與勉之]"라고 하였으나 깨우쳐 일러준다고[告諭] 하는 말은 없다고 하였다. 그런 뒤에 지금 이번에 당신께서 보내준 문자는 비록 주자에 근거할 수 있는 예가 있으나 문자의 격식은 고금에 다름이 있다고 하면서 제생들이 이미 의심이 일어나는 것을 면치 못한다고 하였다. 자신의 생각은 서애집 가운데의 예에 따라서 ‘於是乎諭’ 네 글자로 고쳐 쓰시되, 원본의 여덟 글자를 빼는 것이 무방할 것 같고 또한 사체에 해로움이 없을 것이니, 이를 찾아서 고쳐 보내줄 것을 전했다.
발급인 류세명은 자가 爾能, 호는 寓軒이고, 본관은 豊山이다. 柳雲龍의 증손으로, 柳元履의 아들이다. 柳元之의 문인이다. 1660년(현종 1)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675년(숙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이조좌랑 등을 거쳐 지평·교리·헌납을 역임하였다. 1689년 3월 홍문록에 등재되고, 다시 윤3월에 재차 홍문록에 등재되었다. 저서로는 『우헌집』이 전한다.
수취인 이현일은 자가 翼昇, 호는 葛庵이고, 본관은 載寧, 李時明의 아들이며, 李徽逸의 아우이고, 어머니는 安東張氏로 張興孝의 딸이다. 1652년(효종 3) 중형 이휘일의 『洪範衍義』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1666년(현종 7)에는 영남유생을 대표하여 宋時烈의 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이어 병조참판·자헌대부·우참찬·이조판서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저서로는 『갈암집』과 편서로 『홍범연의』가 있다.
이 편지는 영천이씨 농암종택에서 엮은「先賢筆蹟」 안에 수록되어 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