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2년 11월 23일, 宋興伯이 安東府東邑馬坪員의 밭 16負 7束, 6斗落을 錢文 90兩 받고 塔洞宅 私公所 奴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
내용 및 특징
1852년(철종 3) 11월 23일, 宋興伯이 安東府東邑馬坪員의 밭 16負 7束, 6斗落을 錢文 90兩 받고 塔洞宅 私公所 奴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이다.
송흥백은 안동부동읍마평원 소재의 밭을 塔洞宅 私公所 소속 奴에게 방매한다. 그러나 토지의 실제 매입자는 탑동댁이다. 조선시대 토지매매는 양반이 직접하기도 했지만, 家奴에게 위임하는 경우도 있으며, 매매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노가 있기도 하다. 매매명문을 작성할 때 노비의 이름 앞에 상전의 성씨라든가 상전댁이라는 용어를 명기한다. 본 문기에서는 탑동댁이라고 표기했는데, 이는 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을 가리킨다.
송흥백이 방매하는 토지는 스스로 매득한 것으로, 방매하는 이유는 ‘要用所致’로 표기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일반적인 매매사유이다. 조선전기에는 토지매매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관으로부터 입안을 받기 위해 방매사유, 전래 경위 등을 구체적으로 명시하였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매매문기를 점유하면 소유권을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매매사유를 구체적으로 명기하지 않기도 했다.
고성이씨 종택은 안동부 읍성 동쪽에 있으며, 읍성 북동쪽을 감싸고 있는 영남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던 낙동강이 고성이씨 종택 앞에서 다시 서쪽으로 흐른다. 고성이씨는 15세기 말 이곳에 터전을 잡은 이후, 현재까지 세거하고 있다. 특히 조선후기 성리학이 사회저변으로 확대되면서 고성이씨는 이곳을 중심으로 동성마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혈연적인 집단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중활동을 했다. 문중에는 문중의 자제들이 공부하는 것을 도와주기 위한 贍學所, 종택이나 사당 혹은 亭舍 등을 수리하기 위한 營建所, 혼례와 장례 등에 상부상조하기 위한 洞別所 등의 다양한 조직이 있다. 私公所는 문중에서 개별적으로 운영하는 公所이며, 해당 토지를 매입한 노는 공소에 소속된 노비이다.
송흥백이 방매한 토지의 소재지는 安東府東邑馬坪員이다. 토지의 규모는 諸字 27지번 밭 9卜 2束, 28지번 밭 1卜 7束, 29지번 밭 5卜 8束이며, 6斗落이다. 세 곳의 매매가는 90兩이었다. 송흥백은 해당 토지를 방매하면서 新文記를 작성함과 아울러 이전에 매매가 이루어진 사실을 증명하는 舊文記 3장도 함께 건넨다고 했다. 차후 해당 토지에 대한 문제가 발생하면 이 명문을 가지고 관에 고하여 바로 잡으라고 했다. 이는 토지매매명문이 법적으로 유효한 문건임을 의미한다.
매매명문의 맨 마지막에는 방매인, 증인, 筆執이 각각의 신분과 성명을 기록하고 그 밑에 署押을 하는 것으로 끝난다. 본 문기에는 방매자가 자필로 성명을 기재하고 수결하였을 뿐, 증인과 필집이 따로 있지 않다. 방매자와 매입자가 서로 증명할 수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증인을 생략했을 것이며, 이는 立案을 고려하지 않은 白文文記로 볼 수 있다. 토지매매명문의 종이와 글씨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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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