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8년 12월 2일, 孫永大가 安東南先內里薪木員에 있는 辨字 反田 3卜 9束과 色字 5負, 5斗落只를 83兩 받고 權道一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
내용 및 특징
1828년(순조 28) 12월 2일, 孫永大가 安東南先內里薪木員에 있는 辨字 反田 3卜 9束과 色字 5負, 5斗落只를 83兩 받고 權道一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이다.
손영대가 1828년 12월 2일 권도일에게 토지를 방매하는 이유는 이사를 가기 때문이다. 이사를 가게 되면 해당 토지가 거주지에서 멀어지기 때문에 관리하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지주들의 토지에 대한 소유의식이 강화되면서 거주지 중심으로 토지를 집적하게 되는데, 본 문기는 이러한 현실을 보여준다. 전래 사유는 문기의 일부가 훼손되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來田’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전래된 밭으로 보인다.
토지의 소재지는 南先內里薪木員이다. 남선내리는 안동부 읍성 남쪽에 위치한다. 읍성과 남선 사이에는 낙동강과 그 지류인 반변천이 동서로 흐르며, 남선의 남쪽에는 葛羅山을 비롯한 여러 산들이 솟아 있다. 남쪽의 산과 북쪽의 강 사이에 좁은 곡저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남선에는 안동권씨가 여러 마을에 살았는데, 손영대가 이 토지를 권도일에게 방매한 것도 권도일이 이 지역에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토지의 규모는 辨字 68지번의 反田 3卜 9束과 色字 69지번의 밭 5負이며 모두 5五斗落이다. 조선시대 매매대상 토지 규모의 표기 방식은 結負數, 斗落只, 夜味 등이 있다. 국가에서는 結負制를 보편적으로 사용했지만, 농민들은 斗落으로 많이 표기하였다. 그러다가 17세기 이후에는 斗落과 結負 단위를 함께 쓰는 경우도 많다. 순서는 명문마다 달랐는데, 본 문기에서는 결부를 먼저 적고 두락을 나중에 적었다. 두 곳의 토지 매매가는 錢文 83兩이다. 조선시대 토지매매거래 수단은 포목, 미곡, 소, 화폐 등이었지만, 시기마다 조금씩의 변화가 있었다. 17세기까지는 포목, 미곡 등 현물화폐를 선호했다면, 상평통보의 유통이 활발해지는 18세기 이후에는 화폐를 훨씬 많이 사용하였다. 19세기 대부분의 토지매매는 화폐를 매개로 거래되었다.
토지매매가 결정되면 해당 토지에 대한 소유권을 넘겨주기 위한 문기, 즉 新文記가 작성된다. 해당토지가 거래된 적이 있다면 그것을 증명하는 舊文記도 신문기와 더불어 토지 매입자에게 주어야 한다. 해당 토지 역시 구문기가 있지만, 구문기에는 이번에 방매하지 않는 다른 토지가 함께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손영대는 토지 매입자에게 구문기를 줄 수 없다고 했다. 본문의 말미에는 차후 이 거래와 관련하여 문제가 발생하면 이 문서를 증거자료로 삼을 것을 기재해 두었다.
일반적으로 토지매매명문의 맨 마지막에는 방매인, 증인, 筆執이 각각 신분과 함께 성명을 기록하고 그 밑에 署押을 한다. 방매자는 ‘田主 幼學 孫永大’라고 기재하고 서압하였다. 증인은 朴碩東이며, 본 문기를 작성한 필집은 業儒 金鳳瑞이다. 문서의 오른 쪽 위와 아래 부분이 훼손되어 결락된 글자가 있지만, 방매사유, 토지의 소유지와 매매가 등 매매명문의 내용을 이해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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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