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8년 2월 4일, 李元淑이 安東馬坪員에 있는 밭 4負 4束을 15兩 받고 堂姪 李胤慶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
내용 및 특징
1748년(영조 24) 2월 4일, 李元淑이 安東府馬坪員에 있는 밭 4負 4束을 15兩 받고 堂姪 李胤慶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이다.
이원숙이 토지를 堂姪 李胤慶에게 파는 이유를 ‘要用所致’로 나타냈다. 이는 조선후기 가장 일반적인 매매사유에 해당한다. 16세기까지는 국가에서 토지매매를 제한했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매매를 허가받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매매사유가 필요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전답 매매가 자유롭게 허용되었고 일반적으로 舊文記로 전답매매를 증명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매매사유를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이원숙의 매매문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조선후기에는 ‘要用所致’를 비롯해 ‘切有用處’, ‘重用所致’, ‘適有要用’ 등의 일반적인 사유가 많이 보인다.
이원숙이 방매한 밭은 安東府東邑馬坪員에 있다. 고성이씨는 15세기 후반 안동부 읍성 동쪽에 이거한 이후 조선후기 동성마을을 형성하였다. 고성이씨는 세거지를 중심으로 안동부 읍성의 동쪽의 마평원(현재 용상동 일대), 읍성의 남쪽, 낙동강 건너 南先 등 거주지를 중심으로 토지를 개간하거나 매득해 나갔다. 이윤경은 이곳의 토지를 가문 내의 堂叔 이원숙에게 구입했는데, 이는 경작 및 관리의 편의성 때문일 것이다.
조선시대 토지의 매매는 포목, 미곡, 소, 화폐 등을 매개로 하였다. 그러나 시기별 매매수단은 조금씩 달랐다. 17세기까지는 토지매매에서 포목이 가장 많이 이용되었으나, 상평통보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18세기 이후에는 화폐의 사용이 포목보다 훨씬 많았다. 이원숙 역시 밭 4負 4束의 방매 댓가로 이윤경으로부터 화폐 15냥을 받았다.
토지매매명문에는 대체로 출처를 밝히는데, 크게 전래받은 토지와 자기가 매득한 토지로 나눌 수 있다. 전래의 경우에는 16세기에는 ‘父邊’, ‘母邊’, ‘夫邊’, ‘妻邊’ 등으로 자세히 기록한다. 그러나 후기로 갈수록 ‘전래’로 표기한 사례가 많다. 李元淑이 매매하는 토지는 ‘冊稧’로 사용되었으며, 堂姪 李世慶과 공동소유였다. 舊文記는 이세경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원숙은 ‘稧中成文’을 구문기 대신 이윤경에게 준다고 했다.
토지매매명문의 매도자는 李元淑으로 표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이 직접 매매에 관여하지 않고 家奴에게 위임하는 경우가 있었고, 매매를 전문으로 하는 奴가 있기도 했다. 그런데 이들 奴는 대부분 다른 가문과의 거래에서는 쉽게 볼 수 있으나, 같은 가문끼리의 거래에는 보이지 않는다. 같은 가문에서는 서로 잘 아는 사이였기 때문에 직접 거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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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