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3년 윤11월 8일, 승려인 性聰이 안동助只谷員에 있는 논 28부와 續畓 3복을 5승목 40필과 전미 3석 7두, 백미 20두를 받고 이충의위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
내용 및 특징
1593년(宣祖 26) 윤11월 8일, 승려인 性聰이 안동助只谷員에 있는 논 28부와 續畓 3복을 5승목 40필과 전미 3석 7두, 백미 20두를 받고 이충의위에게 방매하면서 작성해준 토지매매명문이다.
이 문서의 첫 부분에 승려인 성총은 흉년이 심한데다가 당나라 군대와 팔결군 등에게 접대할 비용을 마련할 방법이 없어 자기 소유의 토지를 이충의위댁에 방매한다고 매매사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처럼 토지매매가 원칙적으로 금지됐던 16세기까지는 토지매매시 반드시 토지를 방매하는 구체적인 사유를 적고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1592년과 1593년은 심한 흉년이 들어, 일반 백성들은 전쟁과 흉년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조선시대 토지매매 사유 중 가장 빈번한 것 중 하나가 흉년이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부자들은 이때를 이용해 대규모 토지를 매득하기도 하였다. 이 때문에 정부에서는 흉년시 토지 매매를 금지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토지매매 대상 토지는 모두 조지곡원에 있고, 양안상에는 郡字에 들어있으며 모두 3필지였다. 성총이 이 토지들을 소유하게 된 유래는 필지마다 달랐다. 1필지는 奴 愛石에게 매득한 것으로 10부는 논이었고, 3복은 속답이었다. 속답은 항상 경작하는 논이 아니라, 경작하기도 했다가 묵히기도 했다가 하는 논을 말한다.) 다른 1필지는 성총의 매부인 億命에게 매득한 것으로, 역시 같은 郡字에 있는 10부 면적의 논이었다. 마지막 필지는 성총의 스승인 승려 智還에게 물려받은 것으로 역시 같은 郡字에 있는 8부 면적의 논이었다. 이처럼 3필지로 총 면적 28부의 논과 3복의 속답을 五升木 40필과 田米 3석 7두, 그리고 백미 20두를 받고 이충의위에게 방매하고 있다. 이 거래에서 매득자인 이충의위는 해당토지매매의 대리인으로 자신의 노 億丁을 내세우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들이 토지를 매매하는 경우, 본인이 직접 매매 당사자로서 문서를 작성하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자기 소유의 노비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매매문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이 문서 역시 이러한 예에 속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지매매의 지불 수단을 보면, 화폐가 발행되기 이전에는 통상 布木이나 米穀, 楮貨, 銀貨, 소 등과 같은 현물화폐나 농사에 필요한 물건이 거래대금으로 사용되었다. 화폐 발행 이후에도 한동안은 화폐와 함께 현물화폐가 사용되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거의 화폐가 토지매매 가격의 지불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문서의 매도자는 성총이고 당시 승려의 신분이 낮았음을 반영하듯 手寸으로 署押을 대신하고 있다. 證保는 正兵 任叔이었는데 서압하지 않았으며, 筆執은 正兵 權根이었고 서압하였다. 이 문서의 보존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하지만, 문서 아랫부분에 침수된 흔적이 있고 이로 인해 각행마다 아랫부분 두 글자 정도가 훼손되어 글자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
임진왜란 당시 군사력을 보충하기 위해 8결마다 한사람씩의 군병을 내게 하였다. 그 때문에 농민들이 직접 군병으로 가지 않고 대리인을 내는 경우가 많았다. 이 군인들을 팔결군이라고 하였다. 팔결군에 관한 내용은 『선조수정실록』 선조 30년 1월 23일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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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