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안동군 남선면(南先面) 정상동(亭上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亭上洞은 조선 말기 안동군南先面에 속했던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亭村, 瓮井谷, 三井谷, 巨夫谷 등을 통합하여 정상동(리)가 되었으며, 1983년 안동시에 편입되었다.
정상동은 귀래정의 윗쪽에 있다고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정상동 위로 반변천이 흐르며, 정촌[亭村, 江亭․두들마], 거붓골[거북골․巨夫谷], 도투마리[도투말], 三井谷, 옹정골[瓮井谷, 玉井里], 아래기[阿落], 고절골 등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정촌은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거붓골은 마을에 거북 형상의 야산이 있어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 도투마리는 마을 지형이 돼지 머리와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인데, 마을 지형이 동서는 높고 중앙이 낮아 그 모양이 마치 베틀의 도투마리 같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 삼정곡은 우물 세 개가 삼각형을 이루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옹정골은 오래된 소나무의 큰 뿌리가 우물 속에 들어 있다고 하여 그 이름이 붙여졌다. 아래기는 옹정골에서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마을로, 이곳을 지나던 풍류객이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고절골은 오래된 절이 있어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정상동의 정촌은 固城李氏 집성촌으로 유명하며, 관련 유적으로는 안동 입향조 李增의 둘째 아들 李浤이 세운 귀래정(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호), 이굉의 조카 李肱이 세운 伴鳩亭 및 재사(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8호), 李肱의 아들 李容이 학문을 닦던 魚隱亭 및 재사(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42호)가 있다.
이 가운데 귀래정을 지은 이굉은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 당시 관직이 삭탈되고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쳤으며, 1513년(중종 8) 사직한 뒤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府城 건너편 정촌에 귀래정을 지었는데, 이는 陶淵明의 ‘歸去來辭’의 뜻을 취한 것이다. 귀래정에는 이굉을 비롯해 聾巖 李賢輔, 松齋 李堣, 澤堂 李植, 白沙 尹暄 등 30여 명의 시판이 걸려 있다. 이중환의 『擇里志』에는 귀래정을 임청각, 군자정, 하회의 옥연정과 함께 안동의 수많은 정자 가운데 으뜸으로 꼽았다.
반구정은 李洺의 여섯 째 아들 이굉이 1560년경 건립하였는데, 정자 이름은 그의 호 伴鷗翁에서 비롯되었다. 처음에는 정자만 있었는데, 당시 이곳에서 안동 유림의 시회와 향회가 자주 열림에 따라 동재와 서재를 비롯해 장판각과 舍까지 짓게 되었다.
1998년 고성이씨 李應台(1556~1586)의 묘를 이장 하는 가운데 미투리를 비롯하여 75점의 服飾을 비롯해 부인인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 아버지와 형이 쓴 輓詩, 부채에 쓴 漢時, 장신구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특히 원이 엄마의 편지는 미투리와 함께 젊은 나이에 죽은 남편을 떠나보내는 아내의 안타까운 심정이 드러나 있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1913년 이천동에는 權氏, 金氏, 朴氏, 裵氏, 邊氏, 安氏, 李氏, 林氏, 張氏, 田氏, 趙氏 등 적어도 11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김씨가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朝鮮の 姓』에는 안동 김씨가 23호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남기현, 『史林』 32, 수선사학회, 2009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朝鮮の姓』, 朝鮮總督府, 龍溪書舍, 2002
『安東의 地名由來』, 안동시립민속박물관, 安東民俗博物館, 2002
『朝鮮の姓』, 朝鮮總督府, 龍溪書舍, 2002
『安東의 地名由來』, 안동시립민속박물관, 安東民俗博物館,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