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서지동(西枝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西枝洞은 구한말에 안동군北先面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栗世里의 일부와 북선면西枝里, 台洞, 東先面佳庄洞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서지동이라 하고 臥龍面에 편입되었다.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永嘉誌』에 이 마을은 서가현촌으로 부르다가 후에 서지로 불렀는데 고려 때 典理判書를 지낸 南暉珠(1326~1361)가 처음으로 터를 잡아 살기 시작하였고, 그 뒤 直講 李逢春(1542~1625)이 살았다고 하였다. 『臥龍面誌』에는 直長 李漢(1499~?)이 周村에서 이곳으로 이거한 후 자제들을 가르치기 위해 西澗書堂을 건립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을 길이 없다. 마을 전설에 의하면 ‘원래 이 마을은 삼판서의 출생지이며 아주 부촌이었는데 하루는 스님이 시주하러오니 마을 사람은 시주를 많이 할 데니 유랑민이 적게 오게 해 달라고 하였다. 이에 스님은 숲을 가꾸고 동구 뒤 암석을 뜯어내면 손님이 적게 올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마을사람은 스님의 말대로 숲을 가꾸고 암석을 뜯어내었는데, 이 때 학 세 마리가 날아갔다고 하며 곧 동리가 폐쇄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서지동은 瓦野(왠마), 西間(서갓, 서가촌, 서가현촌, 서지), 寺洞(절골), 가수천촌(가수천촌, 가시내, 가수내, 역수천) 등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가수천촌은 서지동에서 가장 큰 마을로 가수천이 마을 앞을 돌아 흐른다. 이 가수천은 후삼국시대에 고려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이 병산전투을 벌였던 역사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 마을 경내에는 鶴峰神道碑및墓傍石(시도유형문화재 제312호), 義城金氏西枝齋舍(중요민속자료 182호), 安東西枝里城隍堂(민속자료 100호)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남아있다. 이 외에도 興海裵氏嘉水川齋舍, 三疊石, 二疊石, 帽冠石, 裵尙志墓碑 등이 있다.
서지동 출신의 李極模(1990년 애족장)는 일제강점기 때 3・1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현재 서지동에는 姜氏, 權氏, 金氏, 南氏, 朴氏, 方氏, 裵氏, 薛氏, 孫氏, 李氏, 林氏, 鄭氏 등 적어도 12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남씨, 이씨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朝鮮の 姓』에는 서지동에 安東金氏 17호, 英陽南氏 19호, 安東權氏 15호가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남기현, 『史林』 32, 수선사학회, 2009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朝鮮の姓』, 朝鮮總督府, 龍溪書舍, 2002
『安東의 地名由來』, 안동시립민속박물관, 安東民俗博物館, 2002
『朝鮮の姓』, 朝鮮總督府, 龍溪書舍, 2002
『安東의 地名由來』, 안동시립민속박물관, 安東民俗博物館,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