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3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태동(台洞)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
台洞은 구한말에 안동군北先面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馬岩洞의 일부와 東先面下佳邱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태동이라 하고 臥龍面에 편입되었다. 1995년에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면서 안동시에 속하게 되었다.
태동은 所等村(서동골, 서도촌), 台谷(태촌, 태이동촌), 合江(도대), 阿芳谷(아방현), 밤나무골(栗里), 甫峴(보티), 馬岩(말바우), 琴鶴谷(기막골) 등의 자연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서동골은 원래 소등촌으로 불렀으나 음이 변해서 서동골, 서둥골, 서도촌 등으로 칭했고, 마을의 지형이 불을 밝히는 초롱처럼 생겼다고 해서 서등골로 불려지게 되었다고 전한다. 마을 안에는 安東權氏 所等齋舍(중요민속자료 204호)가 있다. 합강은 동쪽의 가구리와 북쪽의 오리원재에서 내려오는 냇물이 이곳에서 합류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아방곡은 예로부터 아름답고 경치가 아주 좋아서 붙은 이름으로 아방현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금학골은 조선 중기 때의 문신인 芝軒 鄭士誠(1545~1607)이 입향하여 望山에 올라 가야금[琴]을 켰더니 난데없이 한 쌍의 鶴이 나타나 춤을 추었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금학골 경내에는 潘南朴氏의 德洞齋舍가 남아있다. 이 외에도 예안이씨 李大仁의 고택인 禮安李氏臥龍派宗宅과 梧軒 李星逸(1633~1709)이 후진을 양성하던 정자인 梧軒, 죽헌 정두와 지헌 정사성의 종택인 竹軒古宅 등이 남아 있다.
마암은 淸州鄭氏와 宣城李氏들이 대대로 세거해온 마을로 약 400년전 僉正을 지낸 竹軒 鄭枓(1508~1576)가 입향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청주정씨가 안동지방에 정착한 것은 고려말이다. 淸河君 鄭㥽이 金方慶(1212~1300)의 손서가 되어 그 아들 䫨(호 雪軒), 誧(호 雪谷) 형제가 외가를 따라 안동府西檜谷里에 살았다고 한다.
태동출신의 權道益(1991년 애국장)은 일제강점기 때 3・1만세시위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13년 현재 태동에는 權氏, 金氏, 南氏, 朴氏, 裵氏, 薛氏, 安氏, 吳氏, 李氏, 張氏, 鄭氏, 池氏, 崔氏, 등 적어도 13개 이상의 성씨가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가운데 김씨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1934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朝鮮の 姓』에는 태동에 宣城李氏 35호, 丹陽張氏 29호, 金海金氏 17호가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어 있다.
「日帝下 朝鮮土地調査事業 計劃案의 變更過程」, 남기현, 『史林』 32, 수선사학회, 2009
『朝鮮土地調査事業硏究』, 愼鏞廈, 韓國硏究院, 1979
『朝鮮土地調査事業の硏究』, 宮嶋博史, 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朝鮮の姓』, 朝鮮總督府, 龍溪書舍, 2002
『安東의 地名由來』, 안동시립민속박물관, 安東民俗博物館, 2002
『朝鮮の姓』, 朝鮮總督府, 龍溪書舍, 2002
『安東의 地名由來』, 안동시립민속박물관, 安東民俗博物館,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