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7년 2월 10일에 승정원에서 왕명을 받아 사간원정언에 임명된 이상정에게 빨리 올라올 것을 명하기 위해 발급한 문서
내용 및 특징
1777년(正祖 1) 2월 10일에 승정원에서 왕명을 받아 사간원정언에 임명된 李象靖에게 빨리 올라올 것을 명하기 위해 발급한 문서이다.
이 문서는 승정원의 담당承旨가 왕명을 받아 그 내용을 직접 작성하여 관직에 제수된 자에게 전달하는 有旨이다. 유지의 서식은 담당승지의 직함과 성을 쓴 뒤에 着名을 하고, 왕명을 기재한 후 연월일을 쓰고, 연호 위에 ‘承政院印’을 찍는다. 표면에는 명을 받는 자의 ‘관함과 성명 開拆’이라고 쓴다. 이 문서의 경우 표면을 확인할 수 없으나 이와 같은 서식에 의거하면 ‘司諫院正言李象靖開坼’이라고 쓰였을 것이다. 뜻은 ‘사간원정언인 이상정이 열어보라’는 말로 다른 사람은 열어볼 수 없다. 왕명서로서 유지의 중요성은 『속대전』에 법제화하여 나타나는데, 만약 이 문서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면[棄置] 전달을 맡은 撥卒은 一律적으로 중벌로 다스리고 해당 수령은 拿處하도록 규정하였다. 이 문서를 발급한 사람은 우승지徐로 되어 있는데 당시 우승지는 徐有慶(1727~?)인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이 문서의 내용은 ‘지금부로 너는 사간원정언에 임명되었으니 속히 역마를 타고[乘馹] 올라오라’는 내용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유지가 발급되기 5일 전인 2월 5일에 이상정이 해당 관직에 임명된 告身이 있다. 그러나 유지는 임명장이 발급됨과 거의 동시에 작성하여 발급되는 것이 보통이다. 따라서 이 문서를 통해 해당 두 문서 간에 약 5일 정도의 시간차를 두고 발급된 사례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의 행력에 의거하면 그는 이 직책에 제수되고 얼마 뒤에 병을 핑계대고 사직했다고 한다.
이상정(1711~1781)의 자는 景文, 호는 大山, 본관은 韓山이다. 부친은 李泰和이며 외조부는 密菴 李栽(1657-1730)이다. 그는 退溪 李滉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하였다. 이후 그의 아우인 小山 李光靖(1714∼1789), 損齋 南漢朝(1744∼1809)를 통하여 定齋 柳致明(1777∼1861)으로 핵맥이 이어지고, 다시 寒洲 李震相(1818∼1886), 俛宇 郭鍾錫(1846∼1919)으로 계승되었다. 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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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회통』,
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