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4년 12월 2일, 영조가 이완에게 문과 병과에 제17인으로 합격한 것을 증명하여 발급한 문과 급제 증서
내용 및 특징
1774년(英祖 50) 12월 2일에 英祖가 李埦에게 문과 병과에 제17인으로 합격한 것을 증명하여 발급한 문과 급제 증서이다.
문과에서는 각각 甲科에 3인, 乙科에 7인, 丙科에 23인을 배정하여 총 33인을 뽑는다. 따라서 위의 문서 내용을 통해 이완은 병과 17인으로 급제하였으므로 전체 27등으로 합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뒷면 표지에는 황색 종이 위에 ‘生員李埦文科丙科第十七人’을 한 줄로 써서 문과 급제자의 당시 신분, 이름 및 성적을 표시하였다. 급제 당시 이완은 35였으며 생원의 신분이었는데, 이보다 약 3년 전인 1771년 2월 18일에 생원 2등 제8인으로 입격했던 이력이 있다.
홍패는 문무과[大科] 합격자에게 내리는 합격증서로 붉은 종이에 쓰기 때문에 白牌와 구분하여 홍패라고 한다. 그리고 『대전통편』[禮典 ․ 璽寶]條에 의하면 試券과 홍패 ․ 백패에는 ‘科擧之寶’를 사용한다고 규정되어있다. 따라서 위의 문서 역시 연호의 두 번째 글자 위에 과거지보를 찍었다. 『경국대전』[禮典 ․ 紅牌式]條에 의거하여 서식을 살펴보면, 처음 ‘敎旨’를 쓰고, 다음 행에 ‘신분성명+文科(또는 武科)+某(甲․乙․丙)科+第몇人+及第+出身者’의 형식으로 내용을 기재한 후에 다음 행에 연월일을 기재하고 새보를 찍는다. 또한 합격에 대한 용어도 대과 합격자에게는 ‘及第’라고 하고 소과 합격자에게는 ‘入格’이라고 써서 구분하였다.
이완(1740~1789)은 자는 致道, 호는 艮巖이며 부친은 大山 李象靖(1711~1781)이다. 그는 1771년에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위의 문서가 발급된 해인 1774년에 대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통훈대부 행홍문관교리를 지냈고, 1882년에 통훈대부 홍문관전한지제교에 추증되었다.『大山集』간행에 숙부 李光靖(1714~1789), 종형 李㙖(1739~1810) 등과 함께 주축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가학을 이어 名儒로 알려졌다고 한다. 저서로는 『艮巖集』‧『痛慕錄』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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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