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8년 8월 4일에 이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권지승문원부정자이상정을 선무랑 연원도 찰방에 임명하는 문서
내용 및 특징
1738년(英祖 14) 8월 4일에 이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權知承文院副正字李象靖을 宣務郞 連原道察訪에 임명하는 문서이다.
승문원부정자는 종9품직이며, 문과 丙科 급제자의 경우에는 三館에 權知로 분관하였다. 선무랑은 종6품 下階, 찰방은 종6품 外官職이다. 연원도는 公忠道 左道의 察訪道 중 하나로 속역은 可興ㆍ黃江ㆍ永山ㆍ長林ㆍ龍安ㆍ丹月ㆍ安富ㆍ新豐ㆍ仁山ㆍ坎原ㆍ泉南ㆍ安陰ㆍ令泉ㆍ吾賜의 14개역이 속한다.
이 문서는 大山 李象靖을 종9품직에서 종6품직으로 올려 주는 문서이다. 그는 1735년 윤4월 17일에 문과 병과 제28인으로 급제한 홍패가 있다. 당시 이상정은 25세였다. 이후 1736년 3월에 권지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된다. 그리고 이 문서를 통해 그는 약 2년 뒤에 선무랑 연원도찰방에 임명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5품 이하의 문무 관원에게 발급되는 敎旨이다. 즉 5품 이하 9품까지는 대간의 署經을 거쳐 이조 ․ 병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발급한다. 문서식도 5품 이하 관원에게 발급하는 고신에는 이조 ․ 병조에서 왕명을 받들어 임명장을 발급한다는 의미의 ‘奉敎’를 쓴다. 着名은 이조나 병조의 당상관과 낭관 각 1인이 하였는데, 이 문서의 발급에는 이조참의 1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이조참의는 鄭羽良(1692∼1754)인 듯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관품과 관직에 차이가 날 경우에는 관직명 앞에 ‘行’과 ‘守’자를 넣어 구분하였다.
이상정(1711~1781)의 자는 景文, 호는 大山, 본관은 韓山이다. 부친은 李泰和이며 密菴 李栽(1657-1730)의 외손으로, 그에게 修學하였다. 이상정은 退溪 李滉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하였다. 『退陶書節要』‧『理氣彙編』‧『讀聖學輯要』등의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학맥은 아우인 小山 李光靖(1714∼1789), 損齋 南漢朝(1744∼1809)를 통하여 定齋 柳致明(1777∼1861)으로 이어지고, 다시 寒洲 李震相(1818∼1886), 俛宇 郭鍾錫(1846∼1919)으로 계승되었다. 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增補版 韓國古文書硏究』, 崔承熙, 지식산업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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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회통』,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