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5년 4월 26일, 영조가 이상정에게 진사 3등 제3인으로 합격한 것을 증명하여 발급한 진사시 합격증서
내용 및 특징
1735년(英祖 11) 4월 26일, 英祖가 李象靖에게 진사 3등 제3인으로 합격한 것을 증명하여 발급한 진사시 합격증서이다.
문무과[大科]가 33인을 뽑는데 비해 생원진사시[小科]에서는 100인을 뽑았는데, 1등이 5명, 2등이 25명, 3등이 70명이다. 이상정은 25살의 나이로 진사시에 3등 제3인으로 합격하였는데, 이는 전체 33등으로 합격하였음을 의미한다. 뒷면 표지에는 황색 종이 위에 ‘幼學李象靖進士三等第三人’을 한 줄로 써서 진사시 급제자의 당시 신분, 이름 및 성적을 표시하였는데, 진사시 합격 당시 이상정은 幼學의 신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정은 동년 3월에 東堂試에 합격하고, 윤4월 17일에는 진사의 신분으로 문과 병과에 제 28인으로 급제하여, 한 달 간격으로 동당시, 소과에 대과에 모두 합격하였다. 그러나 이상정은 5월에 고향으로 돌아오고 그 다음해인 1736년 3월에 가서야 승문원부정자에 보임된다.
진사시에 합격하면 이들에게는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부여되며, 성균관에 입학해 300일 이상 수학하면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진사시에 합격했다는 것은 관직으로 나아갈 가능성에 한 발짝 다가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도 얼마든지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길이 있었으므로 바로 문과에 응시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는 문과합격자에게 발급되는 홍패에서 생원이나 진사가 아닌 幼學의 신분으로 합격한 사람이 많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백패는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 내리는 합격 증서로 흰 종이에 쓰며, 연호의 두 번째 글자 위에 ‘科擧之寶’를 찍는다. 경국대전 禮典에 백패에 관한 문서식이 규정되어 있는데 문무과 합격자에게 발급한 홍패식과 유사하다. 다만 합격증서의 색깔과 합격을 뜻하는 용어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무과 합격자에게는 ‘及第’라고 하고, 생원진사시 합격자에게는 ‘入格’이라고 써서 이들을 구분하였다
이상정(李象靖, 1711~1781)의 자는 景文이고, 호는 大山으로, 본관은 韓山이다. 密菴 李栽(1657-1730)의 외손자로, 이재에게 사사하였다. 이상정은 예로부터 '小退溪'라 불렸을 정도로 退溪 李滉의 학문을 정통으로 계승하면서 18세기 영남지역 유학계를 대표한 인물이다. 『退陶書節要』‧『理氣彙編』‧『讀聖學輯要』등 많은 저서를 남겼으며, 그의 학문적 흐름은 아우인 李光靖과 南漢朝를 통하여 柳致明으로 이어지고, 다시 李震相, 郭鍾錫에게로 계승되었다. 高山書院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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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