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7월 24일, 남세혁이 상대와 상대 가족의 안부를 묻고 담제를 치를 상대를 위로하기 위해 사돈인 김추병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926년 7월 24일에 湖亭 南世赫(1877-1963)이 사돈인 賁石 金樞秉에게 보낸 편지이다. 남세혁은 자가 汝明, 본관이 英陽으로, 寧海槐市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김추병은 자가 善應으로, 槐南 金益洛의 장남이자, 霽山 金聖鐸의 주손이다.
먼저 남세혁은 遞便으로 보낸 안부편지가 중간에 전달되지 못했을까봐 염려하였는데 다시 소식을 알 수 있는 길이 없었다고 하였다. 근래 늦더위가 더욱 심하여 사람을 견디기 어렵게 하니 더욱 김추병의 안부가 궁금하였다고 했다. 그런데 상대의 편지를 받고서 평안하다는 소식을 받게 되고, 전에 보냈던 편지가 잘 전달되었다는 것을 듣게 되어 매우 기뻤다고 하였다. 다만 상대가 大祥을 치르고 아직 남은 눈물이 먹에 섞여 종이를 적심을 알게 되니 왕왕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도 모르게 처연하여 눈물을 흘리게 한다고 했다. 이어 상대 형제와 그 아들 상대의 從氏, 그리고 특히 甥姪의 안부를 물었다. 禫祭를 장차 初丁에 지내려고 하는지 묻고, 담제가 지나면 平服을 입을 터인데, 효자의 망극한 슬픔이 더욱 어떠하겠느냐고 하면서 위로하였다. 남세혁 자신은 예전처럼 지내고 있다고 했으나, 오늘이 어버이의 忌日이라서 슬프다고 했으며 날마다 어지러운 일에 골몰되어 있으므로, 北窓의 맑은 바람도 상쾌하지 않다고 하였다. 끝으로 哲의 어미가 수척해진 것을 자신이 그리 심하게 염려하지는 않는다는 등의 소식을 전하였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이 편지와 같이 피봉이 따로 없는 경우는 내지에 사연을 쓰고 다 접은 다음 그 접은 곳이 바로 보통의 피봉과 동일하게 중간을 기점으로 좌우에 수급자와 발급자에 대한 사항을 쓰고 아래 봉합처에 해당하는 곳에 착명하였다.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