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윤월 17일, 이매구가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봄 향사 때의 소란스러웠던 일에 대해 상대가 발론해주기를 청하기 위하여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917년 윤월 17일에 李邁久가 보낸 편지이다. 이매구는 자가 英可이고, 본관이 驪州로, 李能元의 아들이다. 1882년(고종 19)에 생원시에 입격하였고, 이후 長鬐縣監 등을 지냈다.
이매구는 자신이 새장 속에 갇혀 지내는 와중에 두발 밑에 瘡瘢이 아직 완쾌되지 않았고, 그 외에 온갖 질병이 서로 침노하여 결국 짧은 거리를 운신하는 것도 여의치 못하다고 하였다. 오직 병든 손자의 宿疾이 그 애비가 용한 의원을 만나고 온 후에 조금 차도가 있고 지금은 전에 비해 완쾌되었다고 할 수 있으므로 제일 마음이 놓이는 부분이라고 하였다. 이어 姬母 등의 안부를 전하였고, 특히 서울 학교에 있던 손자가 학업을 마치고 內行을 거느리고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이매구는 春享 때에 金으로 바꾼 무리들이 무뢰배들을 모집하여 舊制를 지키던 姓의 자손들을 구타하고 鄕員 및 新金에게 아부하는 무리들과 함께 享祀를 설행하였으니, 이것을 어찌 ‘安享’이라고 감히 일컬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부득이 두셋 사람에게 削罰을 시행하였으나 끝내 뉘우칠 줄 모르고 그 일파의 至親들을 이끌어 宗家에 절교를 고하였으니 세상에 어찌 조상이 없는 이런 사람들이 있을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이매구는 고을과 문중으로부터 통문과 서간을 발송하여 읍내에 두루 고하였으니, 그 사연을 본다면 내용을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虎溪書院과 臨川書院 등 여러 서원에서 엄정한 말로 答通하여 그들을 攻斥하자는 취지로 상대가 發論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족친인 舜成이 통문을 가지고 떠나갔으니 상대가 그를 만나 내용을 알았을 것이라고 생각된다고 하였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간찰은 회문식은 아니며, 사연을 다 적고나서 앞쪽에 추가하는 글을 적었다.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