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1월 23일, 김익락이 자신의 근황과 촌내 전염병이 지나간 일 등을 알리기 위해 사돈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907년(융희 1) 1월 23일에 槐南 金益洛이 사돈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익락은 자가 相吉, 본관이 의성이다. 金鎭誠의 아들로, 바로 霽山 金聖鐸의 종손이다.
김익락은 지난번 상대가 겪었던 곤경이 매우 사람을 두렵게 하였는데 지금은 한시름 돌리게 되었으니 매우 위안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도 堂內에 일어난 橫厄이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고 한 것에 대하여 멀리서 매우 염려가 된다고 하였다. 자신은 세밑에 아이의 醮禮를 치렀는데 모든 것이 매우 흡족하고 새사람도 賢哲하여 족히 늘그막의 재미가 된다고 하였다. 河回의 여러 사람들은 비록 憂故가 없으나, 文一氏 從兄의 瓦家에 화재가 발생했다고 하였다. 촌내의 전염병 기운이 지금 없어져서 머리를 들고 尋逐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검은 옷을 입은 오랑캐가 문전에 잇따르고 있어 두렵다고 하였다. 며느리가 만삭인데 후사를 이을 희망은 오로지 이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老産으로 자주 자리에 누워 있으므로, 근심스럽고 두려울 따름이라고 하였다. 끝으로 3월 스무날 이후에 한 번 상대를 방문하고자 생각하고 있다고 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간찰의 경우에는 우측과 상단에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여백에 줄을 높여서 적었고, 행 사이에도 내용을 기록했다.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