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3월 1일, 이규일이 자신의 선조의 문집인 『덕봉집』을 보내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905년(광무 9) 3월 1일에 轢下 李圭一(1840-1905)이 보낸 편지이다. 이규일은 자가 克元, 본관이 慶州로, 野隱 李祐榮의 아들이다. 그는 1888년(고종 25)에 식년 생원시에 입격한 바 있다.
이규일은 시력을 잃어서 익숙하게 보던 서책도 잘 볼 수 없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상황이 지난번 느른하여 떨치지 못했던 것보다 못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또 시력을 잃고 스스로를 버린 지경이 되었으니 차라리 남들에게 말하고도 싶지 않다고 하였다. 先祖의 遺稿를 목판에 새긴 지가 이미 만 1년이 되었는데, 지금에야 비로소 일을 마치게 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작년 여름의 흉년으로 인해서 중간에 일을 멈췄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또한 당초에는 卷帙을 이루어서 유림 諸家들로 하여금 선조의 높은 충정과 탁월한 절개가 오로지 某年의 義理에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고 싶었다고 하였다. 그런데 재력이 충분하지 못하여 널리 頒帙하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고 하였다. 모년 의리란 壬午禍變 곧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사건을 바라보는 각 정파의 명분론을 의미하는데, 이규일의 선조인 德峯 李鎭宅은 남인의 입장에서 상소하여 사도세자의 伸寃을 주장하고 그 죽음과 관련된 노론 인물들의 처벌을 요구한 바 있다. 따라서 이 편지의 선조란 이진택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상대는 契分이 자별하고, 또한 『疏會錄』에 있는 金宗鎬 씨는 상대 문중의 선배인 것 같지만 누가 嗣孫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다만 1帙 3冊을 아이로 하여금 올리게 하니 받아 달라고 하였다. 즉 이 편지는 이진택과 상소 운동을 함께했던 인물들의 후손가에게 『덕봉집』을 반질하면서 부친 것이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회문형식에 이르지는 않았으나 오른쪽 여백과 행간에 이어서 내용을 기록했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4번에 걸쳐 줄을 바꾸거나 대두를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