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3월 10일, 유도성이 묘갈명 쓰는 일이 지체된 사유를 전하기 위해 안동부사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903년 3월 10일에 柳道性(1823-�1906)이 묘갈명 쓰는 일이 지체된 사유를 전하기 위해 安東府使에게 보낸 편지이다.
내용으로는 보내준 편지를 받고서 정사를 보며 편안하게 지내는 상대방의 안부를 알게 되어 위로가 되었으며, 자신은 기력이 노쇠해진 뒤로는 말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이어서 이 편지의 주요 내용인 묘갈명에 대한 답변을 하고 있다. 묘갈명을 또 독촉을 받아 죄송하다는 인사로 시작하여, 자신이 일부로 지체한 것이 아니라 병 때문에 혼자 힘으로 하기 어렵다보니 오늘에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두세 번 재촉하며 책방에 물어보니, “글자를 모르는 것이 더 쾌활하다.”는 옛사람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았다고 하였다. 비록 이번에 묘갈명을 지어 올리기는 했지만 쓸모가 없어서 후세에 전할 수 없는 것이니 다시 다른 곳에 알아보는 것이 어떠하겠느냐고 하였다. 이외에도 어렵사리 묘갈명을 쓰고 나서 노안이 더욱 심하여 白眉老兄에게는 안부 편지를 쓰지 못한다고 하였다.
편지 말미의 서명 앞에 ‘民’이라는 호칭을 썼는데, 이는 자신이 속한 지방관에 대해 쓰는 호칭이므로 유도성이 안동부사에게 올린 편지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당시 유도성의 나이는 81세인데, 편지 내용 중에 ‘衰朽’라는 표현으로 볼 때 나이가 상대방보다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유도성은 자가 善汝, 호가 石湖, 본관은 풍산이며, 柳希睦의 아들이다. 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역·경상도사 등을 역임하고, 1842년(헌종 8) 통정대부 비서원승을 지내다가 귀향하였다. 저서로는 『석호유고』가 전한다. 그의 생부 柳祈睦(1802-1861)은 1837년 식년시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고 禮安縣監을 지냈다. 그리고 조부 柳台佐(1763-�1837)는 1794년 정시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정조의 명으로 ‘너는 나를 도우라’는 뜻으로 이름을 ‘이좌’로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학서집』이 전한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惠書’·‘爲政’ 등에 평을 쓰고, ‘俯’’·‘高情’ 등에서 궐을 써서 상대방을 높였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