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6월 15일, 최현식이 상을 당해 서울에서 돌아온 심경을 전하고 근황을 알리며 가뭄에 대한 걱정을 써서 김병황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901년(광무 5) 6월 15일에 崔鉉軾이 金秉璜에게 보낸 편지이다. 최현식은 자가 敬蘇, 본관이 慶州이다. 北部都事崔晩喜의 아들이다. 그는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敬陵參奉 등에 임명된 바 있다. 최현식의 아들인 崔浚은 영감댁 김정섭의 딸과 결혼하였다. 따라서 최현식은 김정섭과 사돈간이다. 그가 이 편지에서 스스로를 ‘査下生’이라고 표현한 부분을 보면 수취인은 그의 사장인 김병황으로 볼 수 있다.
최현식은 객지에서 喪制를 당하니 심정이 더욱 애통하였고,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장례를 치르고 난 후였다고 하였다. 그는 관직을 얻을 요량으로 서울에 가서 그 시끄러운 곳에 오래 머무르다가 가을이 되기 전에 바로 돌아왔었다고 하였다. 그는 이러한 신세를 자조하였다고 했고 중도에 병에 걸려서 상대를 찾아보지도 못하였다고 했다. 그는 末世에는 그칠 줄 아는 것이 욕을 당하지 않는 것에 가깝다고 하였다. 자신의 동생이 서쪽으로 갔다가 겨우 도착하자마자 海上으로 갔는데, 상대의 집과 매우 가까웠음에도 바빠서 그냥 지나치고 말았으니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고 하였다. 나머지 식솔들은 모두 별탈이 없고, 며느리도 잘 지내고 있으므로 매우 다행하다고 하였다. 京鄕에서 가뭄을 공히 겪고 있지만, 몇몇의 郡은 이러한 근심을 면한 것 같은데, 과연 좋게 끝날지는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피봉이 있는 경우도 내지가 단봉에 빈틈없이 딱 맞아 들어간다. 이 편지는 피봉이 있는 경우이다. 상단에 봉함처를 사용하고 있고 자신이 상을 당한 입장이므로 ‘省式謹封’이라고 적었으며 봉함처에는 ‘敬’이라고 적고 있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회문형식은 아니나 오른쪽 여백과 행간에 이어서 내용을 기록했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4번에 걸쳐 줄을 바꾸거나 대두를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