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5월 9일, 김병황이 자신의 큰아들이 석포의 모임에 가지 못한 연유 등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900년(광무 4) 5월 9일에 雲齋 金秉璜(1845-1914)이 보낸 편지이다. 김병황의 자는 渭瑞, 본관은 豐山이다. 同副承旨 洛厓 金斗欽의 손자이자, 金洛周의 아들이다.
먼저, 김병황은 春間에 상대가 왕림하니 이미 지극히 기뻤는데, 지금 또 편지를 보내 주니 정성에 더욱 감격했다고 하였다. 상대 형제의 기거가 건승하고 공부를 하고 있는 상대 아들도 건승하며 同堂의 여러 사람들이 고루 좋다는 소식은 실로 자신이 기원하던 바와 부합하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상대 손녀가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므로, 걱정스러운 마음을 가눌 수 없다고 하였다. 그래도 다행히 자리에 누워 앓고 있지는 않으니 좀 낫다고 하였다. 김병황 자신은 어버이께서 오랫동안 편치 못하여 이미 가슴을 졸이고 있는데, 冢婦에게서 손꼽아 기대하던 일이 끝내 수포로 돌아갔으니 탄식하고 있다고 하였다. 자신의 큰아들이 달포 전에 바다로 갔다가 石浦의 모임에 오지 않았던 것은 친구들을 좋아하여 연해의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세상이 험하니 걱정이 많다고 하였다. 끝으로 河回에 있는 상대의 아들이 자신을 방문하지도 않고 내일 돌아간다고 하는 것 같으므로 섭섭하다는 등의 사연을 전했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간찰의 경우도 일반적인 간찰의 형식을 따랐다.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여백과 행간에 줄을 낮춰서 적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