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9월 8일, 강육이 손자를 잃은 슬픔을 토로하고 종묘의 대례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기 위해 사돈인 김병황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99년(광무 3) 9월 8일에 石下 姜錥(1838-1910)이 사돈인 金秉璜 보낸 편지이다. 발급인 강육은 봉화法田 출신의 학자로, 자는 和仲이고, 본관은 晉州이다. 그는 松西 姜橒의 손자이자, 白樵 姜夏奎의 아들이다. 肇慶廟參奉에 임명된 바 있다. 『풍산김씨세보』에 의하면 강육의 딸이 영감댁의 김이섭에게 시집간 것으로 나온다. 수취인은 강육 자신이 ‘査弟’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면 사돈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사돈은 김이섭을 계자로 들인 아버지인 김병호라고 볼 수 있으나 발급일인 1899년에는 이미 김병호는 사망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사돈은 김이섭의 생가 부친인 金秉璜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강육은 늘그막의 괴로운 회포가 가지가지라고 할 수 있는데 달포 전에는 새로 난 손자를 잃고 말았으니 이는 무슨 운수이며 무슨 액운이냐고 하였다. 珷의 어미가 잘 있는 것이 다행인데 첫돌에서 무가 돌잡이한 것이 매우 사랑스러웠으나, 乃翁과 더불어 감상하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사내아이와 딸아이의 輕重의 구별을 이에서 볼 수 있겠다고 하였다. 농사가 처음에는 자못 풍년이 들 것 같았으나 끝내 성과가 없으니 미리부터 내년 봄이 걱정된다고 하였다. 宗廟의 大禮는 백여 년 동안 겨를이 없었던 일이었는데 지금 하루아침에 윤허를 받았으니 이는 臣民의 막대한 경사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로 인하여 정국이 안정될 수 있지 않겠느냐며 낙관론을 피력하였다. 從君 집안의 식구들은 별탈이 없지만, 斗從의 병이 오랫동안 낫지 않으므로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간찰의 경우에는 우측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여백과 행간에 줄을 낮춰서 적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풍산김씨세보』,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