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8월 28일, 류도석이 유배에서 풀려 난 후 자신의 감회를 펴고 돌림병의 피해 상황을 알리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94년(고종 31) 8월 28일에 海史 柳道奭(1828-1908)이 보낸 편지이다. 류도석은 자가 太弼이고 본관이 豐山이다. 류성룡의 아들인 修菴 柳袗의 9대 종손이고, 洛坡 柳厚祚의 손자이며, 溪堂 柳疇睦의 아들이다. 류후조가 재상의 반열에 이르자, 蔭仕로 童蒙敎官이 되었고, 후에 慈仁縣監에 임명되었다. 자인 현감으로 재직할 때에, 역모에 가담한 혐의로 14년 동안 녹도에 유배되어 고초를 겪은 바 있다. 그의 부친인 류주목은 老圃 朴光錫의 아들인 朴基載의 사위이며, 영감댁 洛厓 金斗欽은 노포의 사위이다.
류도석은 천만 뜻밖에 姪婦의 賢淑한 儀範을 지금 갑자기 보게 되니 매우 기뻤다고 하였다. 또한 옛날의 감회와 지금의 회포를 가눌 수 없어서 두 줄기 눈물이 흘러 내렸다고 하였다. 次孫의 영오하고 명민함이 또한 그 조부의 원통함을 위로할 만하니 절로 기뻤다고 하였고, 長兒를 만나지 못하였기에 섭섭한 마음을 이루 표현하기 어려웠다고 하였다. 혼란스러움은 두 집안이 피차일반이며 돌림병을 피해 밖으로 나가 있는 상황도 역시 같다고 하였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定處가 있는 데 반해 자신은 그렇지 못하기에 더욱 근심스럽다고 하였다. 류도석은 자신의 아들이 일전에 그 妻家로 가서 몸을 숨길 곳을 알아보고자 하였으나 이 어지러운 상황은 모든 곳에서 마찬가지이므로 안주할 곳이 없었다고 하였다. 상대 아들이 하룻밤을 자고 곧 작별하게 된 것은 너무나 섭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는 억지로 붙잡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피봉이 있는 경우도 내지가 단봉에 빈틈없이 딱 맞아 들어간다. 이 편지는 피봉이 있는 경우이다. 상단에 봉함처를 사용하고 있고 상대 집안의 안부를 묻는 편지이므로 ‘謹候狀’이라고 적고 있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4번에 걸쳐 줄을 바꾸거나 극행을 올리고 대두를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