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4월 15일, 이수악이 적소에 도착한 직후의 자신의 근황과 심경 등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87년(고종 24) 4월에 于軒 李壽岳(1845-1927)이 適所에 도착한 직후의 자신의 근황과 심경 등을 전하기 위해 보낸 편지이다. 발급인 이수악은 자가 穉崇(혹은 致崇), 본관이 재령으로, 李聃榮의 아들이다. 또한 盤窩 李光振의 증손이자, 梧窩 李相奎의 손자로, 存齋 李徽逸의 주손이다. 저서에 문집이 있다. 수취인은 시기적으로 볼 때, 충효당의 李性浩나 李秉七 모두 될 수 있으나, 여러 정황을 살펴볼 때 이성호인 것으로 보인다.
먼저 자신이 매우 멀리 떠나 있는 상황과 그 감회에 대해 언급하고, 수취인의 집안사람과 촌내의 안부를 물었다. 특히 형제분들이 서로 모여 공부하고 있는 재미가 어떠하냐고 하였다. 儒家로서는 이것을 벗어나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며, 더구나 우리 선조께서 가르침을 남기셨으니 한 순간이라도 공부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했다.
이수악은 자신이 비로소 적소에 도달하였는데, 도중에 겪은 고생이 매우 심하였다고 했다. 발급인 이수악이 4년에 걸쳐 吉州에서 귀양 생활을 하게 된 일과 관련된 내용이다. 길주에는 봄보리가 이제 나고 진달래꽃이 한창 피었다고 했으며 백두산의 눈이 한 길 넘게 쌓였다고 하면서, 귀양살이를 온 자신의 심경도 전했다. 이곳의 풍속이 淳古함을 숭상하고 또 좋은 주인을 얻었다고 했다. 文人과 詩人이 날마다 서로 형제처럼 교유하고 있다고도 했다. 伯振 형도 이곳에 있으므로 자신의 마음을 누그러지게 한다고 했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 편지는 회문식은 아니다. 다만 처음 내용을 쓰고, 여백이 없자 다시 처음에 비워 둔 공간에서부터 줄을 낮춰서 행 사이에 내용을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