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8월 10일, 황기룡이 상대 어버이의 부음을 듣고 위로하기 위하여 보낸 위문편지
내용 및 특징
1885년(고종 22) 8월 10일에 湖隱 黃基龍(1832-1906)이 보낸 위문편지이다. 황기룡은 자가 敬集이고 본관이 昌原이다.
먼저 황기룡은 상대의 어버이의 춘추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고 병환이 위중하다고 들은 것도 아닌데 어찌 오늘 갑자기 부음이 이를 줄 알았겠느냐고 하였다. 또한 상대의 지극한 효성에 감응되어 반드시 신명의 보우가 있었을 것인데, 하늘은 어찌 이리도 무심하여 갑자기 이런 지경에 이르렀냐고 하였다. 이어 初終葬禮를 능히 유감이 없이 잘 치렀는지 묻고 평소 상대의 순수하고 지극한 효성으로 반드시 정해진 예법을 넘어 슬퍼하였을 것이라고 하면서 부디 슬픔을 잘 억제하여 효성으로써 효성을 상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할 것을 당부하였다. 황기룡은 깊은 知己의 정과 독실하게 서로 아꼈던 마음으로, 姓은 비록 다르나 一家와 다름없는 사이로 비기기까지 하였으나 사는 곳이 너무나 멀어 지금까지 거의 10년 동안 만나지 못하였다고 했다. 또한 편지로 서로 안부를 묻는 것도 뜻대로 하기가 어려웠으므로, 吉凶 등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고 하였다. 이제 부음을 받고서 마땅히 직접 나아가 정성을 표하여야 하지만 쓸데없는 일에 골몰되어 그러지 못하였다고 하면서 너그러운 양해를 구한다고 하였다. 또 자신은 丙年 이래로 삼년상을 치르면서 喪慘을 실컷 겪었고, 1883년(고종 20) 8월에는 三從兄인 時仲氏를 잃었다고 하면서 매우 애통하고 한스럽다고 하였다. 끝으로 상대가 상중에 몸을 잘 지탱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喪禮는 죽음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四禮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서간문 가운데 위장은 일반 서간에 비해 특별한 서식을 갖추고 있다. 즉 일반 서간에 비해 글씨를 작게 쓰고 초서가 아닌 정서를 쓰며 지면의 상단을 확연하게 띄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어 역시 특별하게 사용하는데, 서신을 나타내는 용어로 書나 札 등의 용어를 쓰지 않고 疏를 쓴다. 또 수취인이 喪人일 경우 哀座下 ․ 哀座前 ․ 哀座 ․ 哀次 등의 용어를,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孝廬 ․ 廬所 ․ 廬下 ․ 廬次 ․ 廬史라고 칭한다. 그리고 服人일 경우는 服座下 ․ 服座前 ․ 服座 ․ 服案 ․ 服史 등의 용어를 쓴다. 이는 모두 『禮記』와 『孝經』 등에 근거하여 ‘哀’자와 ‘服’자를 쓰는 것이다. 이외에도 발급인은 스스로를 罪人이라고 표현하고, 문두에 稽顙 ․ 稽顙再拜 ․ 頓首 ․ 頓首再拜 ․ 省禮 ․ 省式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용어들 역시 발급인 또는 수취인의 당시 상황이나 위계관계 등에 따라 구분하여 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