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4년 윤월 11일, 이교영 등이 이현발의 죽음에 대해 위로하고 종복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충효당 주손가에 보낸 위문편지
내용 및 특징
1884년(고종 21) 윤월에 李敎榮 등이 藥坡 李鉉發의 죽음에 대해 위로하고 宗服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충효당 주손가에 보낸 위문편지이다. 발급인 이교영·李德榮·李壽嶷·李壽嵒은 모두 재령이씨 문중의 인물들이며 楮谷에 거주하고 있었다.
먼저 문중의 운이 쇠퇴하여 갑자기 오늘 宗君의 상사가 났으니 長德의 遺範을 다시 의지할 데가 없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종가 여러 사람의 안부를 묻고 四日之制를 예법에 따라 잘 지냈느냐고 했다. 부음을 듣던 날에 나아가 곡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사정을 말하고, 매우 슬프고 부끄러웠다고 했다. 宗服은 지금 세상에서 모두 이를 행하고 있으니 情禮에 본래 그러한 바라고 했다. 그런데 주손가의 이전 편지의 小紙에서 ‘여기에서 服을 만드는 것은 정당한 도리가 아니고 또 베를 쓰는 일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혐의가 없지 않으므로 대개 사람마다 受服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는데, 재정이 어려운 문중에서 큰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고, 이곳에서 나누어 짓는다면 취사에 어려운 점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서 몇 사람의 巾帶를 지어 부쳐 보내주면 도리와 사체에 모두 마땅할 것이라고 했다. 종복을 정한 상황에서 絲帶를 하고 출입하는 것이 미안하니 지체하지 말아 달라고 했다.
喪禮는 죽음이라는 부분에 있어서 四禮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따라서 서간문 가운데 위장은 일반 서간에 비해 특별한 서식을 갖추고 있다. 즉 일반 서간에 비해 글씨를 작게 쓰고 초서가 아닌 정서를 쓰며 지면의 상단을 확연하게 띄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용어 역시 특별하게 사용하는데, 서신을 나타내는 용어로 書나 札 등의 용어를 쓰지 않고 疏를 쓴다. 또 수취인이 喪人일 경우 哀座下․ 哀座前․ 哀座․ 哀次 등의 용어를, 그가 머물고 있는 곳을 孝廬․ 廬所․ 廬下․ 廬次․ 廬史라고 칭한다. 그리고 服人일 경우는 服座下․ 服座前․ 服座․ 服案․服史 등의 용어를 쓴다. 이는 모두 『禮記』와 『孝經』 등에 근거하여 ‘哀’자와 ‘服’자를 쓰는 것이다. 이외에도 발급인은 스스로를 罪人이라고 표현하고, 문두에 稽顙․稽顙再拜․頓首․頓首再拜․省禮․省式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 용어들 역시 발급인 또는 수취인의 당시 상황이나 위계관계 등에 따라 구분하여 쓴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