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윤3월 26일, 강유가 김두흠의 대상을 위문하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아들을 대신 보내는 것에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전하기 위해 김병황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79년(고종 16) 윤3월 26일에 姜鍮가 雲齋 金秉璜(1845-1914)에게 보낸 편지이다. 강유는 法田 출신의 진주강씨 인물이다. 자는 聖器로, 櫟庵 姜晉奎의 장남이다. 그리고 김병황의 조부인 김두흠의 막내사위이다. 따라서 강유는 김병황의 고모부가 된다. 그는 順陵參奉에 임명된 바 있다.
먼저 강유는 김두흠의 大祥이 임박하였으므로 김병황의 간절한 슬픔이 클 것이라고 하였다. 더구나 김병황이 근래 重制를 당하였기에 애통한 마음이 더하여졌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도 자신이 위문편지를 보내는 것도 오히려 뒤늦었다고 하면서 미안한 마음을 표하였다. 이어 김병황이 잘 버티고 있으며, 가족과 이웃들이 돌림병을 면하여, 제사를 지내는 데에 걸림돌이 없는지 안부를 물었다. 강유 자신은 어버이의 건강이 좋지 못하여 오랫동안 곁을 비우기가 어렵고 큰며느리가 아직 해산하지 못했고 아이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위독한 상황에서 心神을 안정시킬 수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아들을 대신해서 보내니 미안하다고 하였다.
『풍산김씨세보』에 의하면 이 편지의 발급일인 1879년 윤3월은 김두흠이 별세한 1877년 4월 이후 24개월째 되는 해이다. 따라서 이 시기 즈음이 그의 대상이 임박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피봉에 ‘變制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김병황의 부친인 김낙주는 이미 1869년에 별세하였기에 손자인 김병황이 承重孫이 된다. 따라서 이 편지의 피봉에 承重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피봉이 있는 경우도 내지가 단봉에 빈틈없이 딱 맞아 들어간다. 이 편지는 피봉이 있는 경우이다. 하단에 봉함처를 사용하고 있고 상대 집안의 대상을 위문하기 위한 목적의 편지이므로 봉함처에는 ‘省式謹封’이라고 적고 있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는 오른쪽 여백에 이어서 글을 쓰고 있고, 중간 하단부의 행을 바꾸어 평궐을 한 공간에는 추록을 적고 있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약 8번에 걸쳐 줄을 바꾸거나 극행을 올리고 대두를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풍산김씨세보』,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