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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8년 이만인(李晩寅)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3+KSM-XF.1878.4717-20110630.00632570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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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이만인, 김병황
작성지역 경상북도 안동시
작성시기 1878
형태사항 크기: 22.5 X 47.4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미 풍산김씨 영감댁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8년 이만인(李晩寅) 서간(書簡)
이만인은 어느덧 김병황의 조부이자 자신의 장인인 김두흠이 별세한지 12개월 되는 날이 임박하게 되니, 상대의 효성스러운 생각이 끝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상대의 모친과 상대의 안부를 물었다. 특히 미동에 돌림병 기운이 없어져서 제사를 지낼 만하냐고 물었다. 이만인은 노친의 건강이 좋지 않으신 지 6, 7일이나 되었다는 등의 요즈음 상황을 전하였고, 焚黃은 22일로 정해졌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분황이란 나라에서 관직 등을 제수 받으면 해당 교지를 누른 종이에 베껴 써서 선조의 사당 앞에서 태우고 제사하는 의식이다. 그러나 마음은 기쁘지만 책응하기가 어려워 걱정스럽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김두흠의 소상에 직접 참여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김동현

상세정보

1878년 4월 3일, 이만인김두흠의 소상을 위문하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이로 인해 소상에 참여하지 못함을 알리기 위해 김병황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78년(고종 15) 4월 3일에 龍山 李晩寅(1834-1897)이 雲齋 金秉璜(1845-1914)에게 보낸 편지이다. 이만인은 자가 君宅이고, 본관이 眞城으로, 李彙喬의 아들이다. 그는 재야에서 학문 연구와 교육 활동에 전념한 학자로, 특히 퇴계학파의 정통적 입장인 心合理氣說의 관점에서 寒洲學派의 心卽理說을 강력히 비판하였다. 그는 자신의 학문적 역량을 바탕으로 많은 후생들을 가르치고 성장시켰다. 그는 김병황의 조부인 洛厓 金斗欽의 둘째사위이므로, 김병황에게는 고모부가 된다.
먼저 이만인은 어느덧 김병황의 조부이자 자신의 장인인 김두흠의 小祥이 임박하게 되니, 김병황의 효성스러운 생각이 끝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 김병황의 모친과 김병황의 안부를 물었다. 특히 美洞에 돌림병 기운이 없어져서 제사를 지낼 만하냐고 물었다. 이만인은 노친이 泄症과 감기를 앓으셔서 건강이 좋지 않으신 지 6, 7일이나 되었다는 등의 근황을 전하였고, 焚黃은 22일로 정해졌다고 하였다. 은총이 지하에 미치게 되었으니 기쁜 마음이 얼굴에 가득하지만, 策應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걱정스럽다고도 하였다. 끝으로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김두흠의 소상에 직접 참여하기 어렵게 되었다고 하면서 이해해 달라고 하였다.
풍산김씨세보』에 의하면 이 편지의 발급일인 1878년 4월은 김두흠이 별세한 1877년 4월 이후 12개월째 되는 해이다. 따라서 이 시기 즈음이 그의 소상이 임박한 날이라고 할 수 있다. 김병황은 상중에 있었으므로 피봉에 ‘哀侍案’, ‘省式謹封’, ‘疏’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김병황의 부친인 김낙주는 이미 1869년에 별세하였기에 손자인 김병황은 承重孫이 된다.
이 편지는 피봉의 여러 가지 형식 가운데 單封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단봉이라는 것은 피봉이 하나인 것으로 피봉이 있는 경우와 피봉이 없는 경우가 있다. 피봉이 있는 경우도 내지가 단봉에 빈틈없이 딱 맞아 들어간다. 이 편지는 피봉이 있는 경우이다. 상단에 봉함처를 사용하고 있고 상대 집안의 대상을 위문하기 위한 목적의 편지이므로 ‘省式謹封’이라고 적고 있다.
平闕은 문장을 쓰는 과정에서 특정한 명사를 만났을 때 행을 옮겨 쓰거나 혹은 공간을 띄워서 글자를 쓰지 않는 것을 말한다. 평은 행을 바꾸는 것으로 擡頭를 말하고, 궐은 글자를 비워두는 것을 隔字 또는 間字를 말한다. 세로쓰기를 할 때, 평상적으로 시작하는 글자의 위치를 ‘平行’이라고 하는데, 대두법을 사용하여 높이 적는 위치를 ‘極行’이라고 한다. 궐은 평처럼 대두를 사용하여 극행으로 올려 적거나 행을 바꾸는 것과 달리 존대를 해야 할 용어를 띄어 적는 방법이다. 이 간찰에서는 약 10번에 걸쳐 줄을 바꾸거나 극행을 올리고 대두를 사용하여 존경을 표현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풍산김씨세보』,
김장경,김동현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78년 이만인(李晩寅) 서간(書簡)

美洞 哀侍案 疏上
省式 居然此峕矣
尊王考令公 外舅氏 小朞奄臨
孝思痛隕 寧有窮已 況
哀所處 非尋常界地 追古愴今 尤何以
自譬 伏問卽日
萱闈無損 哀履何似 曾知閤村
不是靜貼地 果能淸廓 堪
將事否 並入遠溯 晩寅 老人患泄患感
失適者 六七日 傍命 又闔眼從事於湯
爐近狀 無可述 私家燃黃 卜在卄二
恩寵漏泉 慶祝溢楣 而猶不能無憾
於策應之艱關 人顧不知足 若是耶
政坐憂海愁山 今番匍匐 失於情禮
恕以勢故 則哀之賜大矣 餘惟
節順 不宣
戊寅巳月初三日 姻下 李晩寅 疏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