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12월 16일, 류도성이 연말인사를 전하고 금곡 소수가 출발한 일을 알아보기 위해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77년 12월 16일에 柳道性(1823-�1906)이 연말 인사를 하고, 금곡의 䟽首가 출발한 일에 대해 알아보기 위해서 보낸 편지이다.
지난번에 가마를 가지고 온 하인이 돌아갈 때, 지방에 있어서 답장을 하지 못한 자신의 섭섭한 마음을 전하고, 추운 계절에 상대방을 비롯한 여러 식구들의 안부를 물었다. 자신의 누이는 해산한 지 벌써 많은 날이 지나서 근심이 풀었을 것이고, 또 아들을 낳았으니 더욱 축하할 일이라고 하였다. 자신의 부모님은 추위를 당해 많이 편찮으시며, 자신도 예전만 못한 채로 움츠리고 시일을 보내고 있다고 하면서 중국南宋의 放翁이 “옛날에는 9월 횃대 위의 매와 같더니 지금은 10월 창가의 파리와 같은 신세라네.”라고 한 시를 인용하여 자신의 신세를 전했다. 이어서 상대방에게 龍山에서의 신혼 재미에 대해 묻고, 이진사가 암행어사의 염찰에 걸려 官辱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못들은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한해가 저물어 가는데, 새해를 맞이하여 더욱 복을 받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추록의 내용에는 금곡의 䟽首가 출발한 일에 대한 소식을 묻고 있다. 자신은 자세히 알 길이 없으니 만약 들은 소식이 있으면 자세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하였다.
유도성은 자가 善汝, 호가 石湖, 본관은 풍산이며, 柳希睦의 아들이다. 遺逸로 천거되어 선공감역·경상도사 등을 역임하고, 1842년(헌종 8) 통정대부 비서원승을 지내다가 귀향하였다. 저서로는 『석호유고』가 전한다. 그의 생부 柳祈睦(1802-1861)은 1837년 식년시 3등으로 생원에 합격하고 禮安縣監을 지냈다. 그리고 조부 柳台佐(1763-�1837)는 1794년 정시 병과로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정조의 명으로 ‘너는 나를 도우라’는 뜻으로 이름을 ‘이좌’로 부르도록 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학서집』이 전한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간찰은 일반적인 회문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여백에 줄을 낮춰서 추록을 적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朴大鉉,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