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1월 22일, 김두흠이 상대에게 새해 인사를 하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상대가 관직에 제수 된 상황을 축하하는 등의 내용으로 사돈인 강진규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77년(고종 14) 1월 22일에 洛厓 金斗欽(1804-1877)이 사돈인 櫟菴 姜晉奎(1817-1891)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두흠은 자가 文一, 본관이 豐山이다. 그는 鶴沙 金應祖의 형인 深谷 金慶祖의 후손으로, 鶴南 金重佑의 아들이다. 생부는 金重南이다. 그는 文科와 重試에 급제하고, 관직이 同副承旨에 이르렀다. 강진규는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禮曹參判에 오른 인물로, 특히 西學 배척에 앞장섰다. 강진규의 아들 姜鍮는 발급인 김두흠의 막내사위이다.
먼저 김두흠은 지난 섣달에 芋洞편으로 하여금 전달하도록 했던 자신의 안부편지를 받아 보았는지 물었다. 이어 강진규 및 그 아들, 손자들의 새해 안부를 물었다. 특히 외손자 姜漵 6남매가 모두 차례로 돌림병을 앓는다는 것을 다른 데를 통해 전해 듣고 매우 심하게 놀랐다고 하였다. 김두흠 자신은 11월 보름 후에 알 수 없는 질병으로 1달을 앓았는데 대세는 조금 덜해졌지만 남은 증세가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지금까지 석 달 동안 병이 수습될 기약이 없으니,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사람 노릇하는 것은 바랄 수 없을 것 같다고 하였다. 죽은 손자의 祥制가 장차 끝나려고 하는데, 저간의 참통한 심정을 병중에 감당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일전에 龍溪 인편으로 陽이 어미의 편지를 받아 보았는데, 강진규의 伯氏 어르신이 체직되어 돌아왔다고 하였으므로 탄식하였으나 강진규가 同知經筵事에 제수되었으므로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聖器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묻고 험한 때에 멀리 나가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기 때문에 염려가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지난 섣달 말에 庶母와 동서를 이틀 사이에 잃었다고 하면서 집안의 禍가 극에 이르렀으니 애통한 심정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간찰은 일반적인 회문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여백과 행간에 줄을 낮춰서 적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