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2월 20일, 김두흠이 자신의 상황을 알리고 연전에 빌려간 물건을 갚을 기일을 물리기 위해 김포에 거주하는 김생원양천댁에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76년(고종 13) 2월 20일에 洛厓 金斗欽(1804-1877)이 보낸 편지이다. 발급인 김두흠은 자가 文一, 본관이 豐山이다. 鶴沙 金應祖의 형인 深谷 金慶祖의 후손으로, 鶴南 金重佑의 아들이다. 생부는 金重南이다. 그는 文科와 重試에 급제하고, 관직이 同副承旨에 이르렀다. 풍산김씨 영감댁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도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관인으로서 승지에 올랐기 때문이다. 수취인은 같은 풍산김씨로서 金浦에 거주하던 인물이다.
김두흠은 집안의 화(禍)가 겹치고 혹독하여 7년 동안에 아들 둘과 손자 둘을 靑山에 묻었다고 하였다. 원통한 마음을 이미 말할 수 없을 지경인데 몸을 쇠약하게 하는 병이 이러한 화로 인해 위중해져서 오랫동안 누워 신음하고 있다고 하였다. 김두흠은 연전에 빌린 물건을 자신이 잊어버리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상대가 기왕에 참았으니 조금만 더 참아준다면 자신이 상경할 때에 분명히 갚겠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이 마을과 梧溪의 각 댁에 별탈이 없으므로 다행하다고 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간찰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회문의 형식을 취하지는 않았다. 우측에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사연을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