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7월 18일, 류기영이 대원군의 정치에 관한 항간의 소문이나 암행어사에 남인이 등용된 일 등의 서울 소식에 대해 이야기 하고 병호시비에 관하여 보합한 일 등을 알리기 위해 김두흠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75년(고종 12) 7월 18일에 鶴下 柳驥榮(1825-1880)이 洛厓 金斗欽에게 보낸 편지이다. 발급인 류기영은 자가 士雍이고, 본관이 豐山으로, 厓雲 柳致睦의 손자이다.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관직으로는 佐郞을 지냈다. 수취인 김두흠의 손자인 雲齋 金秉璜은 발급인 류기영의 사위가 된다.
류기영은 아직 확실한 서울 소식을 접하지는 못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이 좌우에서 듣기로, 혹자는 “국가의 모든 일을 院位에게 품의하여 결정하고 있고, 各殿이 모두 화합하고 있다.”고 한 반면에, 혹자는 “다시 孔里로 행차하여 정사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세상일에 대한 두 가지 설이 모순되어 믿을 수가 없다고 하였다. 各道에 파견된 暗行御史가 남인에서 5명이나 나왔으니 혹 점차 정권을 잡을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屛山書院의 일은 류기영 자신의 집안에서 서신을 보냈으니 근래 다행히 保合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으므로 한 집안의 우의에 비추어 지극히 다행스럽다고 하였다. 끝으로 柳道性의 처가 계속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매우 염려스럽다고 하였고, 洛坡大監이 서늘한 기운이 난 후에 서원에 행차하겠다고 하였으니 그때 김두흠도 왕림해 달라고 하였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간찰의 경우도 일반적인 간찰의 형식을 따랐다. 회전식으로 돌려쓰지는 않았지만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여백과 행간에 줄을 낮춰서 적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