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8월 9일, 김병황이 집안 근황을 알리고 자신의 초택 등을 부탁하기 위해 조부인 김두흠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75년(고종 12) 8월 9일에 雲齋 金秉璜이 조부인 洛厓 金斗欽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두흠은 자가 文一, 본관이 豐山이다. 鶴沙 金應祖의 형인 深谷 金慶祖의 후손으로, 鶴南 金重佑의 아들이다. 생부는 金重南이다. 그는 文科와 重試에 급제하고, 관직이 同副承旨에 이르렀다. 그는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이 竹史 金洛周이고 차남이 金洛會이다. 발급인 김병황은 김낙주의 장남이다.
김병황은 자신이 어제 午時에 麻津의 묘소에 어둠을 무릅쓰고 도착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大僚가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상태에서도 衣冠을 폐하지 않으니, 근력이 아직 康旺한 데에 흠탄하였다고 했다. 김병황은 그가 이달 보름 전에 屛山書院에 행차하여 김두흠을 만나기를 청하고 다시 집으로 향할 것이라고 하였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妊兒의 혼사는 직접 만나 약속하고자 하였는데, 신랑감을 보건대 그가 吉士가 될 것임을 알만 하였으니 훗날 淸顯職에도 오르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였다.
김병황은 김두흠에게 수령이 과연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자신이 科擧를 보는 일은 바람을 잡는 일처럼 가망이 없다고 할 만하고 抄擇의 일도 기미가 없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깊은 밤에 생각해 보았더니 아직 한 가지 계책이 있다고 했다. 본관 수령이 겸임하던 고을을 나와 올라가면 겸임 수령은 반드시 본관 수령과 아주 가까운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본관 수령이 상경할 때에 본관 수령을 길에서 전송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자신의 이름을 써서 가고 겸관 수령에게 청탁편지를 보내게 된다면 기어이 한 자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