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5년 10월 19일, 류기영이 초택과 관련한 일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사위인 김병황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75년(고종 12) 10월 19일에 鶴下 柳驥榮(1825-1880)이 자신의 사위인 雲齋 金秉璜(1845-1914)에게 보낸 편지이다. 발급인 류기영은 자가 士雍이고, 본관이 豐山으로, 厓雲 柳致睦의 손자이다. 사마시에 입격하였고, 관직으로는 佐郞을 지냈다. 수취인 김병황은 자가 渭瑞, 본관이 豐山이다. 同副承旨 洛厓 金斗欽의 손자이자, 金洛周의 아들이다.
먼저, 류기영은 과거 합격자 발표를 고대하였는데 김병황이 낙방하였다는 소식을 받게 되니 비할 바 없이 실망스럽다고 하였다. 더구나 김병황이 늙으신 부모를 봉양하는 처지에서 번번이 낙방하고 있으니, 자신이 때때로 생각하면 그저 한탄스럽기만 하다고 하였다. 류기영은 김병황이 편지에서 査丈이 건강을 상하였고 季氏인 金秉璿(1853-1875)의 병환도 현재 차도가 없으며 김병황도 피로가 쌓인 채로 연일 墓奠에 골몰되어 휴식을 취할 길이 없다고 하였으므로, 평상시에 비할 수 없이 걱정된다고 하였다. 류기영은 자신의 근황이 그저 ‘汨沒’ 두 글자로 요약된다고 하였다. 從弟의 大祥이 내일 있고 姪婦의 葬事가 모레 있으니, 슬프고 혼란스러운 마음을 형용하기 어렵다고 하였다.
抄擇에 관한 일은 자신이 힘을 다하여 하였으나 覆科에 이르러서 아주 조금의 힘도 도울 수 없어서 끝내 결과가 좋지 않았으니 이는 본래 미리 생각했던 것이었다고 했다. 아마도 김병황이 시험을 볼 때에 류기영이 어떤 입김을 넣으려다가 여의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류기영은 김병황이 편지에서 아이들에게 공부나 가르치고 童僕들에게 농사를 독려하겠다고 한 말에 대하여 칭찬하였다. 대개 정해진 분을 아랑곳하지 않고 벼슬을 도모할 경우에는 아무것도 구애받지 않고 서울에서 유락하는 것이 제1책이요, 돈을 산처럼 쌓아놓고 그것으로 귀신까지 부릴 수 있는 것이 제2책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병황은 위로는 늙으신 어버이가 있고 아래로는 병든 동생이 있으니 遠遊할 수가 없고, 근근이 빚을 갚고 형편이 점점 어려워지고 있으니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하였다. 류기영은 결론적으로 분수대로 처신하면서 좋은 환경을 기다린다면 반드시 때와 운이 올 것이라고 하면서, 마음을 편히 갖고 공부하라고 당부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간찰의 경우에는 우측과 상단에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여백에 남은 사연을 적고, 행간에도 줄을 낮춰서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