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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년 류주목(柳疇睦)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3+KSM-XF.1870.4725-20110630.006325700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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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류주목, 김두흠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작성시기 1870
형태사항 크기: 38.2 X 54
장정: 낱장
수량: 2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미 풍산김씨 영감댁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70년 류주목(柳疇睦) 서간(書簡)
1870년 3월 25일에 류주목김두흠에게 보낸 편지이다. 상대방의 손자를 만나니 눈물이 났다고 하면서 편지를 받고서 상대방의 몸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걱정된다고 하였다. 자신은 감기를 앓는 아버지 류후조와 천연두를 앓는 동생 때문에 근심스러우며, 아이들이 모두 밖에 있어서 혼자 고생하고 있다고 하였다. 별지의 내용은 관직에 있는 상황에서 죽은 아들을 위해 상복을 입는 경우에 대한 답변이다.
서진영

상세정보

1870년 3월 25일, 류주목이 상대의 아들인 김낙주의 상사에 애도하고 자신의 근황을 알리며 복을 입는 것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해 김두흠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70년 3월 25일에 류주목김두흠에게 보낸 편지이다. 尙州愚川 출신인 류주목은 자가 叔斌이고, 본관이 豐山이다. 洛坡 柳厚祚의 장남이며, 江皐 柳尋春의 손자이다. 西厓 柳成龍의 아들인 修巖 柳袗의 주손이다. 그는 一道의 丈席으로서 당시 영남의 추앙을 받던 학자이다. 그의 학문은 류심춘의 가르침을 집안에서 승습하고 성현의 책과 조선 諸先儒의 학설을 널리 연구한 데에 기초하였다고 한다. 이 편지는 별지가 있는데, 별지는 『계당집』 권3에 「答金承旨問目」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먼저, 류주목은 喪人인 김두흠의 손자를 만나게 되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고 하였다. 이어 주신 편지를 받고서 상중에 김두흠이 몸의 오른쪽이 마비되는 증상으로 늘 불편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염려되었다고 하였다. 류주목류후조가 근래 감기를 앓아 많은 날 편치 못하시므로 매우 초조하다고 하였고, 집안에 痘患이 생겨서 동생이 병에 걸렸으므로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아이들이 모두 밖에 있기 때문에 자신이 홀로 수응하느라 고생을 참아내기 어렵다고 하였다. 끝으로 직접 가서 위문하겠다고 하였다. 별지에서는 관직에 있는 상황에서 죽은 아들을 위해 斬衰를 입는 경우에 대한 류주목의 답변이 실려 있다. 禮學에 밝았던 류주목의 학문적 성향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간찰의 경우도 내용이 짧아서 회문의 형태에 이르지는 않았고,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70년 류주목(柳疇睦) 서간(書簡)

美洞 制座下 將命
愚溪 謹拜 答狀上
省式 歲後春去 恒伏切悲溸 卽奉
令彧喪人 不覺淚無從也 仍伏承
下狀 備審玆辰
制中氣力 方以右片不仁症 每欠寧節 區區下
忱 不任仰慮之至 戚從姪 家君 近添感祟
多日靡安 情私甚焦 而家有痘憂 弟家犯
沴 薰慮不容達 且兒少輩 一並在外 獨
當酬應 勞碌難耐耳 □衙信 近阻 爲晉
棘抱 以此雨勢 强請還歸 事勢則不得不然
而慮深於悵 餘在未臥前 一進仰慰耳
不備 伏惟
制下察 狀上
庚午三月二十五日 戚從姪 柳疇睦 再拜狀上
心制闋服後 自當平服耳
爲長子斬衰條 旣曰斬衰 則當與父
喪無異 然國法 不許解官 則居處
飮食及其他百爲 亦有與父喪異者矣云
云 然則在官者 去其玉圈宕巾耶 玉
圈宕巾 似不當去也
心制闋服後平服 而玉圈宕巾 則過二
十七月後用之 似宜
心制人之二十七月持服 近聞盛行於江左
然心制終祥闋制後 麤黑笠麤布 造色纓 素衣白帶
以終禫月 此古禮也 心制人之無長子
衰者 自當如此 矧今下執事 身有長
子衰耶 愚見如此 勿以愚言爲準 博
考審處之 伏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