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3월 1일, 류주목이 안부를 묻고 도소에 관한 일을 알리기 위해 김두흠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69년(고종 6) 3월 1일에 溪堂 柳疇睦(1813-1872)이 洛厓 金斗欽(1804-1877)에게 보낸 편지이다. 尙州의 愚川 출신인 류주목은 자가 叔斌이고, 본관이 豐山이다. 洛坡 柳厚祚의 장남이며, 江皐 柳尋春의 손자이다. 西厓 柳成龍의 아들인 修巖 柳袗의 주손이다. 그는 一道의 丈席으로서 당시 영남의 추앙을 받던 학자이다. 그의 학문은 류심춘의 가르침을 집안에서 승습하고 성현의 책과 조선 諸先儒의 학설을 널리 연구한 데에 기초하였다고 한다. 수취인은 피봉의 ‘金承旨’라는 말에서 김두흠임을 알 수 있고, 廬下라는 말에서 김두흠이 상중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류주목은 김두흠이 보낸 편지에 아직 답장하지 못했는데 계속해서 또 편지를 받게 되니 감사했다고 하였다. 편지를 통해서 봄비가 내리고 매우 추운 이때에 김두흠의 기력이 건승하고 가족들이 고루 평안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매우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김두흠 부인의 병이 계속되고 있다고 하므로 깊이 염려가 되었는데, 어제 張學士가 온 것으로 인하여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위안이 되었다고 하였다. 류주목 자신은 류후조가 무사히 도착하였고 慶事를 잘 치렀으므로 더할 나위 없이 기쁘고 다행하다고 하였다. 다만 날짜를 잡았다가 물리기를 여러 번 하여 사람들을 널리 부를 수 없었으므로 자리를 나란히 하여 경사를 함께하지 못하였다고 했다. 道疏(道의 전체 유생 곧 道儒들이 집단으로 상소하는 것)에 관한 일은 그 일을 주관하는 자가 근래 어떻게 처치하였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집안은 調停論을 견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류주목은 각각 자신의 견해를 지킬 따름이라고 하였다. 聞慶에 城을 쌓는 일은 경상도 관찰사가 防啓하였고 일을 시작한 사람이 達城에서 갑자기 죽어 그 일이 정지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하였다. 추신에서는, 李晩蓍의 근황이 평안하다고 하였다.
간찰의 사연이 짧을 경우 상하좌우의 여백이 그대로 남지만, 사연이 다 끝나지 않을 경우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 다음은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으며, 그 다음은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하여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간찰의 경우도 일반적인 간찰의 형식을 따랐다. 우측에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돌려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행간에 줄을 낮춰서 적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