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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년 류주목(柳疇睦) 서간(書簡) 이미지+텍스트 본문 확대 본문 축소

KSAC+K03+KSM-XF.1867.4725-20110630.00632570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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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기본정보 리스트
분류 형식분류: 고문서-서간통고류-서간
내용분류: 개인-생활-서간
작성주체 류주목, 김낙주
작성지역 경상북도 상주시
작성시기 1867
형태사항 크기: 32.3 X 48
장정: 낱장
수량: 1장
재질: 종이
표기문자: 한자
소장정보 원소장처: 안동 오미 풍산김씨 영감댁 /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오미리 문중소개
현소장처: 한국국학진흥원 /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서부리

안내정보

1867년 류주목(柳疇睦) 서간(書簡)
1867년 12월 27일에 류주목김낙주에게 보낸 편지이다. 먼저 류주목은 상대방의 삼촌이 별세했다는 부고를 받고서 놀라고 슬펐던 마음을 전하고, 상대방과 어른들의 슬픈 심정을 위로하고 있다. 자신이 부고를 받던 날 문상과 위문편지를 하지 못했는데 먼저 편지를 보내주니 부끄러웠다고 하면서 상대방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의 안부를 알게 되어 기뻤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인 김두흠과 자신의 아버지 류후조가 남쪽에서 돌아오면 같이 부모님을 수행하여 경치 좋은 곳을 유람하자고 하였다. 또한 임금께서 특별히 자신을 임명한 일을 언급하면서 이런 일로 상대방이 편지를 보내 주시니 더욱 감사하고 부끄럽다고 하였다.
서진영

상세정보

1867년 12월 27일, 류주목이 자신의 근황을 알리고 김두흠류후조가 내려오면 함께 산수지간에서 노닐기를 바란다는 내용으로 김낙주에게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67년(고종 4) 12월 27일에 溪堂 柳疇睦(1813-1872)이 金洛周에게 보낸 편지이다. 尙州愚川 출신인 류주목은 자가 叔斌이고, 본관이 豐山이다. 洛坡 柳厚祚의 장남이며, 江皐 柳尋春의 손자이다. 西厓 柳成龍의 아들인 修巖 柳袗의 주손이다. 그는 一道의 丈席으로서 당시 영남의 추앙을 받던 학자이다. 그의 학문은 류심춘의 가르침을 집안에서 승습하고 성현의 책과 조선 諸先儒의 학설을 널리 연구한 데에 기초하였다고 한다. 수취인은 본문의 “春府令監”이라는 말에서 洛厓 金斗欽의 아들인 김낙주임을 알 수 있다.
먼저 류주목김낙주의 阮丈의 부고를 받고 매우 놀라고 슬펐다고 하였다. 이어 김낙주가 비통한 마음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고 하고, 더구나 살아 계신 重堂과 늘그막에 형제를 잃은 김두흠의 심정이 오죽하겠느냐고 하였다. 류주목은 부고를 받던 날 가지 못한 것은 고사하고 위문편지도 하지 못했는데, 김낙주가 먼저 편지를 보내주니 부끄러웠다고 하였다. 편지를 통해, 重闈의 기거가 괜찮고 김낙주김두흠이 평안하다는 소식을 받았고 김낙주도 건승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기뻤다고 하였다. 또 아들 金秉璜은 장래가 있으니 과거에서의 득실은 말할 것도 없다면서 위로하였다. 류주목은 일전에 김두흠의 편지를 받았더니 정초에 류후조가 남쪽으로 돌아올 때에 모시고 내려오겠노라고 하였다고 했다. 자신은 반드시 그렇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돌아온 후에 양가의 부형이 세상일을 사양하고 산수지간에서 서로 노닐고 자신과 김낙주가 几杖을 잡고 수행한다면 그 즐거움이 매우 클 것이라고 하면서 바라고 또 바란다고 했다. 特旨로 자신을 관직에 제수하라는 명이 내린 것에 대하여, 그저 두려운 마음만 든다고 하였다. 무슨 이유로 수년 동안 祖子孫 삼대가 임금의 특별한 대우를 받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조심스러워진다고 하였다. 김낙주가 이런 일로 사람을 보내어 물어 주니 더욱 감사하고 부끄럽다고 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간찰의 경우에는 우측에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남아 있는 여백과 행간에 줄을 낮춰서 기록하고, 남은 사연은 시계방향으로 돌려써서 행 사이에도 내용을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

이미지

원문 텍스트

1867년 류주목(柳疇睦) 서간(書簡)

謹謝慰狀上
省式白 不意凶變
尊阮府尊丈喪事 承
訃驚怛 何能已已 緬惟
親憂悲慟 何堪 況
重堂篤老在上
春府令監 暮境割胖耶 何術以扶慰也 仰爲之
悲念切切耳 顧疇睦 以兩家誼契 承平日
眷護 匍匐之未遂姑舍 一紙 尙此不
得奉慰於
執事 而遽承此先施之問 惶恧恨歎 無
爲辭 奈何 因伏審急景如行
重闈寢匕〖匙〗 別無大家損節
京信 近承安聞
侍餘服候一衛 區區仰慰不任下悰 渭
瑞得失 何足爲言耶 其人必有來頭
其安侍可幸 日前 承
春府令監下書 則開正後 家君南歸時
陪來爲敎 姑未知其必然 而還次後
兩家父兄 謝絶世事 相與徜徉於
山水之間 而吾與執事 操杖几而隨之 其
樂寧有涯耶 是祝是祝 戚從服人 續承
壺庭安信 私幸 而來旬後 候門 預伏
切欣喜欣喜 至如歲暮之感 自不能按住
奈何 意外
特旨之命 只覺震懼靡晤 感祝 數年
之內 祖子孫三代 蒙荷
異數 何故而至此也 不□持盈之戒耳
荷此專价致問 尤感尤悚逼除 伏祝
侍奉 迓新萬福 餘不
備狀 希
崇亮
丁卯臘月念七日 戚從服人 柳疇睦 狀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