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6월 18일, 안동부사심동신이 비변사의 연교를 통하여 토지 전결 소유 및 개간상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풍북의 각 동의 각 댁에 보낸 편지
내용 및 특징
1866년(고종 3) 6월 18일에 安東府使沈東臣이 豊北 각 洞의 각 宅에 보낸 편지이다. 심동신은 본관이 靑松으로, 沈雯의 아들이다. 그는 1850년(철종 1)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황해도관찰사와 사헌부대사헌에 올랐다. 특히 1865년(고종 2) 1월에 안동부사에 임명되어 재직하다가, 다시 승지가 되어 중앙으로 되돌아갔다. 이 편지는 피봉에 풍북면의 각 집안에 윤시한 후 答標를 받아들이라는 명령이 적혀 있다.
심동신은 査結에 대한 일로 연달아 전령을 내렸으니 각 댁에서 이미 윤시하였을 것이라고 했다. 筵敎가 이와 같이 간절하고 비변사의 관칙이 준엄하니, 사결을 조금도 소홀히 거행할 수 없는 입장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別色을 보내서 곳곳마다 踏驗하여, 冒頉과 遠起, 新墾 상황을 빠짐없이 조사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심동신은 이 과정에서 吏輩들의 농간이 발생하여 민간에 허다한 폐단을 끼칠 우려가 있다고 하면서, 이럴 바에야 각 댁에서 전결 소유 및 개간 상황을 각자 사실대로 자수하는 것이 낫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각자가 惕念하여 스스로 밝힌다면 이 어찌 公私가 모두 편리하고 官民이 서로 믿는 의리가 아니겠느냐고 하였다. 전토를 넉넉히 가지고 있는 小民의 경우는 각각 그 洞에서 일일이 효유하여 일체 자수하도록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간찰의 경우도 회문식 형태이다. 우측에 여백을 많이 남기고 내용을 쓰기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돌려쓰고 행간에도 줄을 낮추어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김장경,최연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