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 5월 3일, 이중린 외 2인이 상대의 아들인 김병옥의 상사를 위로하고 자신들은 참석하지 못함을 알리기 위해 김낙회에게 보낸 위문편지
내용 및 특징
1865년(고종 2) 5월 3일에 雲圃 李中麟(1838-1917) 등이 상대의 아들인 金秉鈺의 상사를 위로하고 자신들은 참석하지 못함을 알리기 위해 金洛會에게 보낸 慰狀이다. 발급인은 이중린, 李中鳳, 李中鶴인데, 이들은 형제지간으로 雲山 李彙載의 손자이자, 石圃 李晩蓍의 아들이다. 洛厓 金斗欽의 둘째아들인 수취인 김낙회는 이중린의 조부인 이휘재의 사위이므로, 이중린 등에게 고모부가 된다. 김낙회는 金魯欽의 후사로 출계하였다. 『풍산김씨세보』에 의하면 김낙회는 金洛中으로 되어있다.
먼저 이들은 김낙회 아들의 상사는 통곡하는 것 외에는 다시 드릴 말씀이 없다고 하였다. 자신들로 하여금 이러한 말을 하게하고 김낙회로 하여금 이러한 위문을 듣게 하였으니, 이 어찌 몽매간에라도 생각했던 일이었겠느냐고 하였다. 도무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이제 막 于禮를 치르고 갑자기 이런 변을 당하였으니, 從嫂氏도 천고에 짝이 없는 딱한 상황이 되었다고 하였다. 이어 김낙회 아들의 뛰어난 자질과 자신들과의 인연을 술회하면서 깊이 애통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부디 고모부인 김낙회가 애통한 마음을 잘 다스려 건강을 훼손하지 않기를 당부 드렸다. 자신들은 마땅히 직접 나아가 슬픔을 표해야 하지만 늙으신 어버이께서 마음을 상해 건강을 해치실까 염려가 되고, 변고가 의심스러운 병[돌림병]에서 나왔으므로 어버이를 모시는 처지에 위험을 무릅쓰기 어렵다고 하였다. 다만 남쪽을 바라다보면서 눈물을 흘릴 따름이라고 하였다.
간찰의 내지를 작성할 때 대체로 처음에 피봉의 너비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 되는 부분을 여백으로 비워두고 시작한다. 간찰의 사연이 다 끝나지 않았을 때에는 본문의 상여백에 이어 적고, 그래도 모자라면 시작할 때 남겨 두었던 오른쪽 여백에 이어 적는다. 그래도 모자라면, 본문의 행간에 이어 적는다. 이러한 순서는 간찰을 개봉해서 읽어 나갈 때 접은 것을 펴서 읽은 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내지를 돌려 가며 읽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한시의 回文體처럼 형태가 유사하게 내지를 돌아가면서 쓰는 회문식의 배치는 간찰뿐만 아니라 언간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 편지의 경우 90도를 기준으로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며 내용을 기록했다.
『朝鮮時代 簡札 書式 硏究』, 金孝京, 한국학 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5
『漢文書札의 格式과 用語 硏究』, 金血祚, 영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풍산김씨세보』,
김장경,최연숙